『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 사람이 「장미」라면 「장미」가 되게 하고/ 그 사람이 「호박」이라면 「호박」이 되게 하는 것/ 「장미」에게 「호박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고/ 「호박」에게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 것/ 「장미의 가시」를 받아들이고/ 「호박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네/ 왜냐하면 사랑은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네』
제가 존경하는 어느 교수 신부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본 시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의 이중 계명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과 맘몬(돈)의 대립 속에서 하나를 선택함으로 얻게 되는 기쁨 뿐 아니라 그로 인해 감수해야 할 희생과 아픔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가지는 장점과 더불어 그의 한계와 부족함까지 받아들이는 용기, 다시 말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랑의 삶은 성숙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서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이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유다교의 잡다한 613가지 계명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 시대를 전후해서 유다교 식자들이 자주 논했던 주제였습니다.
물론 통일된 의견은 없었지만 대개 으뜸 계명으로는 「황금율」이나 (율사 힐렐) 「하느님 사랑」을 으뜸계명으로 여겼고(보통의 유다인들), 때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을 기본 계명으로 보는가 하면(필로) 135년경에 순교한 율사 아키바는 「이웃 사랑」을 율법의 통일 원리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보면 이들이 주장한 으뜸 계명과 예수님의 이중계명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 계명에는 율법의 비판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으뜸 계명을 다른 계명보다 중요시했을 뿐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계명을 비판하거나 무효화할 의도가 없었던 반면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환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저촉되는 율법은 과감히 상대화하거나 폐기시켰다는 점이 독특한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웃 사랑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라고 이 두 계명을 연결시킴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쓰이는 「이웃」이란 개념도 유다인들이 동족을 「이웃」으로 본 반면 복음서는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 유다인들의 관점과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정의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이야기하면서 한번쯤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최고의 계명」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의 현장에서는 자주 실패를 경험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접할 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책임에 대해 눈감고 그 실패의 원인을 다른 무엇에 전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실패했을 때 그 이유를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하기에, 또 생활이 바쁘고 힘들기에 등등 다른 사람이나 생활 환경에 책임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환경들은 분명 나의 사랑의 삶을 방해해 왔고 방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져야하고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사랑의 삶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실패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생활환경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을 중단하고, 힘들고 고통이 수반되겠지만 나의 선택에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실패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으려 노력할 때,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삶인 사랑은 좀 더 성숙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