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후배 수녀님이 보내준 편지에는 이런 글이 들어 있었다. 『인생의 겨울 길을 걸을 때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먼저 치워놓은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탄길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라고 했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이내 반성하는 마음이 되고 말았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안전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군가에 의해 이미 「치워진 길」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편의 아름다운 기도들은 사실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누군가 「먼저 치워놓은 눈길」 같은 것일 수 있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말, 시 구절을 들으면서 어쩜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해 놓았을까 감탄할 때가 있는 것처럼, 시편은 우리를 위해 그런 역할을 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정서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시편의 몇 가지 구체적 특성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시편은 구약성서 성문서 부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책인데, 이는 주목할 만한 시사성을 가진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가장 선두에 배치하는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시편이 성문서에서 가장 먼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편이 1) 성문서의 「서론」 역할, 즉 전체의 내용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2) 성문서의 여타 책들보다 앞서 가장 먼저 그 정경성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가 복음의 마지막 부분(24, 44)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을 증언하실 때, 구약성서 전체를 율법서와 예언서, 시편으로 구분하신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성문서의 여러 책들 중 시편을 그 대표격으로 간주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였지만, 시편만큼 신약성서에 자주 인용되는 책도 없을 것이다. 시편은 신약에 100번 이상 인용되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인용은 신약 시대에 시편이 얼마나 실제 생활 안에 밀접하게 녹아있었는지를 제시한다. 마태26, 30에서 만찬을 종결하는 의미로 예수님은 「힐렐」을 부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숨지시는 순간에도 탄식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22의 첫 부분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우신다(마태27, 46).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인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루가23, 46) 역시 시편31, 5의 인용이었다. 이외에도 시편을 암송하고 노래하는 습관에 대해서도 신약성서는 자주 보도하고 있다(1고린14, 26 에페5, 19 골로3, 16 등 참조).
시편의 또 다른 특징은 구약 전체의 신학과 사관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사실인데, 이는 시편이 구약 시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고 그 어느 책보다 오랜 구전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생긴 특성이다. 특별히 구약의 기도문은 대개 시편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기도들은 다른 그 어떤 기도문들 보다 전문성과 정교함을 지닌다. 기도말에 문체적 기교가 들어 있으며, 치밀한 문학적 틀 안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시편에 수록되어있지 않은 기도문도 존재한다. 대략 97개 정도인데(예를 들어 1사무2, 1~10 출애 38, 10~20 요나2, 3~10 나훔1, 2~11 하바3, 1~19 등), 이 「시편 밖에서 만나는 기도문」(non-Psalmic prayer)은 시편의 기도에 비해 산만하고, 단편적이며, 비조직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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