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도심에는 100여개가 넘는 이른바 「보수」 단체들이 주최한 집회가 열렸다. 한국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납북인사가족협의회 등 총 114개 단체는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를 열고 주한미군 철수 반대와 북한 핵개발 저지 등을 주장했다.
이들은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분단 후 지난 50여년 동안 지켜온 조국과 자유가 벼랑에 몰려 있다며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와 국가 번영을 위해 정부는 미국과 손잡으라고 촉구했다.
7만여명이 운집한 이날 집회에서는 애국가 제창에 이어 미국 국가가 연주됐고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 유엔기를 연단 앞에서 행사장 뒤편까지 머리 위로 넘겨 옮기는 장관이 연출됐으며 태극기와 성조기가 『우리는 미국을 사랑합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일렁였다.
같은 날 시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종로 탑골공원에서는 또 다른 성격의 집회가 열렸다. 여중생 범대위,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 등 역시 소위 「진보」 진영의 250여개 단체가 함께 마련한 「민족자주반전평화 촛불대행진」이 그것이다.
공원에 모인 2000여명은 공원에서 3?1절 기념식을 가진 뒤 광화문까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촛불대행진을 가졌다. 이들은 문정현 신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재야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이라크 전쟁 반대, 반전평화구축 등의 구호와 함께 미국의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면서 행진을 벌였고 대형 성조기를 반으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마친 뒤 해산했다.
사회 양분이냐, 성숙한 사회냐
민족의 역사적 기념일인 3.1절을 기해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가지 집회가 동시에 열린 것을 두고 우리 사회는 두 가지의 견해를 보여주었다. 그 하나는 북한 핵개발과 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노골적으로 야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에 대한 깊은 우려였다.
이러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은 그 같은 모습을 보면서 지난 1946년 광복 후 처음 맞았던 3.1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일제 치하의 3.1 독립 만세는 모든 민족이 하나로 뭉쳐 외쳤던 목소리였기에 전세계에 한민족의 기상을 알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27년 뒤인 1946년, 광복 후 처음 맞았던 3?1절에는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따로 기념식을 가졌었고 시가 행진 중에 무력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후 좌우익은 서로 진영을 갖춰 본격적인 대결에 돌입했다.
어쩌면 그 당시 우리 민족 사이에 빚어졌던 균열과 갈등이 자칫 사회의 양분이라는 남한 내부의 갈등으로 고착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은 뜻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우려였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사회 원로 지도층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성명서를 내고 온 국민이 힘을 모을 것을 호소한 것도 이러한 사회 갈등과 국론의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오히려 한국 사회가 충분히 저력을 갖춘 사회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비록 이들 집회가 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충격적인 장면이기는 했지만 그처럼 극단을 달리는 견해들이 이처럼 자유롭게 피력되고 자발적인 집회로 드러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성격의 집회가 이처럼 완벽하게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것은 「보수」와 「진보」 두 가지 견해가 모두 자기의 장점과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시민과 국민들에게 자기 주장을 피력해도 괜찮을 만큼 한국 사회는 다양한 견해에 대한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자 현재 한국 사회와 국가가 직면해 있는 위기와 과제를 나름대로의 시각에 따라 판단하고 그 해법에 대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일견,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대해서 일말의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현재 우리 사회 안에 분명히 공존하는 두 가지 경향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 대해서 이제는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에 열린 자세 필요
물론 우리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견해와 주장을 가진 사람들의 갈등과 분열은 언제나 상존해왔다. 특히 「보수」와 「진보」는 항상 서로 첨예하게 부딪히며 국가와 사회 발전, 혹은 안녕과 질서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항상 두 가지 견해는, 특히 진보는 대부분 소수의 견해였고 현재의 질서 유지에 힘쓰는 보수는 주류였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는 대선을 포함한 일련의 사회적 과정을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듯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국민의 40% 정도가 스스로를 진보 성향이라고 생각하는 등 한국 사람들의 평균적 이념 성향이 중도보다는 다소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지난해말 발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조사에서 나타난 2002년 현재 한국인의 이념성향을 보면 스스로 진보 성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39.1%, 보수성향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이보다 적은 35.1%로 나타났고 엄격한 중도를 표방한 사람이 25.7%였다. 즉 한국인의 이념 성향이 통계적 정상 분포를 보이며 보수와 진보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이 조사를 실시한 주최측의 평가이다.
특히 남북 관계나 분배 복지, 사회 개방, 남녀 관계 등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별 질의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평균적 이념 성향은 중도보다 다소 진보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경향은 신세대와 구세대, 진보와 보수가 대결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것과도 맞물려 눈길을 끌었다.
나아가 최근에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 규정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일부에서는 기존의 한국 보수주의는 단지 기득권층의 자기 옹호 수단이며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실천할 뜻이 없는 세력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새로운 보수주의를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에 과연 보수주의가 있는가를 자문하며 한국의 보수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이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하며 다른 이는 일부 자칭 보수들은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보수와 진보를 둘러싼 논쟁이 어떤 것이든 이제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 안에 보수와 진보의 세력과 주장들은 엄연히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대대적으로 주장될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극히 염려스러운 국론의 분열이고, 사회 양분의 우려를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안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그 해법을 논의할 수 있는 포용력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상대의 입장과 주장을 적절하게 검토하고 비판하며 수용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적과 나를 흑백으로 구분하고 나아가 전쟁하듯이 편을 갈라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도, 인정할 뜻도 없을 때 보수와 진보의 논란은 민족과 사회의 공멸로 이어질 것이다.
보수-진보 넘어서는 하느님 섭리
우리 사회 안에서 드러나는 이같은 양극적인 사고와 견해 차이는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회의 구성원 역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인 영역만을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과 대립을 생각해볼 때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주장들은 계속돼 왔고 정보사회의 도래, 시민의식의 성장, 평신도의 교육 및 자의식 강화 등의 요인들은 교회 안에서의 쇄신 문제와 관련돼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름하고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설픈 보수와 진보의 가름은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훼손할 위험성을 갖고 있으며 2천여년을 전해 내려온 가톨릭 교회의 지혜와 풍성한 유산을 소홀하게 취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보수를 지향하는 듯한 선입견 속에서도 교회의 통찰력과 예지력은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교회는 놀라울 만큼 혁신적으로 새로운 변모를 보이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오히려 보수나 진보를 넘어서 성령의 역사와 하느님의 섭리에 기인한다.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이처럼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섭리와 뜻에 대해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와 그 구성원이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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