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평화연대 대표로 지난 6월 11일부터 7월 28일까지 48일간 이라크에서 난민지원 활동을 펼치고 8월 2일 귀국한 마리아 수도회 김재복 수사가 이라크 현지에서 겪은 체험담을 담은 체류기를 보내왔다. 수도자의 신분으로 이라크 난민들에게 다가간 그의 발걸음에서는 아픔과 함께 희망을 향한 여정이 읽힌다.
이라크, 21세기 벽두부터 숱한 아픔의 소리로 인류에게 소리치던 그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화려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손짓하던 바로 그 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6월 7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 터키와 요르단 암만을 거쳐 6월 11일, 48일간의 일정의 첫 걸음을 내디딘 이라크에서 처음 우리를 맞이한 이들은 이른바 전쟁에 온 몸으로 맞선 「인간방패」라 불리는 이들.
「인간방패」. 어찌 사람이 싸움터의 한가운데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들은 스스로 자원해 나선 길이었으니 그들을 대하는 첫 마음이 범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그다드, 꿈과 희망의 땅이어야 마땅했을 그 곳은 인간이 드리우는 불의에 깊은 상처를 입어가고 있는 듯했다. 우리 일행이 처음 접한 얘기는 국경에서 미군들이 NGO나 구호단체들이 지원하는 의약품을 차단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모습이 이내 아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제 자신을 내던지고 싶습니다』
인간방패로 나선 한 젊은이가 긴 한숨에 실어 허공에 내뱉듯 토해낸 말에는 어떤 의지가 읽혔다.
미군 검문소를 향하는 도로에서 당한 일은 지금 떠올려도 아프다. 순서를 기다리는 우리 차 옆으로 다른 차량이 끼어들자 미군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운전자 얼굴에 총을 겨누고 위협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뒤섞인 상.하수도와 찌꺼기들이 역류해 집안으로 넘치고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뤄 악취를 풍기고 있는 가운데서도 전쟁통에 다리가 온전한 아이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후 우리의 활동은 대개 병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채 완공도 되지 않은 건물에서 커튼 몇개로 가린 진료실, 그리고 의자와 탁자가 고작이었지만 한가닥 희망을 지닌 이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보통 밀려드는 환자들로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진료활동은 밤 9시가 넘기기 일쑤였다.
간간이 가정집의 한 귀퉁이를 얻어 분유를 나눠주는 활동도 펼쳤다. 분유를 받아든 어머니들의 퀭한 눈과 마주쳤을 때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동이 트는 어느 아침. 나는 들판에서 어린아이를 만났다. 눈과 미소, 손짓발짓이면 마음을 나누기 어렵지 않았다.
「고요히 나를 내려놓고 고통에 집중하자. 아픔을 고요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기를 소망하자」
들길을 되돌아오는 길에 고요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 내가 하는 일에 소명의식을 부여하기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에 맡기자는 생각이었다.
도미니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라파엘 병원과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운영하는 장애아동시설 「미셔너리 오브 채러티」를 들어서는 순간 내 몸은 굳어졌다. 손발이 잘려나간 아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나는 존재의 무력함을 느꼈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한 아이에게 다가가 안았다. 나를 보고 웃는 해맑은 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또 한번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인구 200만명의 알 후리아.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꿈이 무너진 가족을 만났다. 축구선수였던 남자는 집 앞 길에서 폭탄 파편을 맞고 쓰러졌단다. 그리고 쓰러진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간 아버지도 역시 파편을 맞고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집안은 흡사 벌집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총탄흔적 투성이었다. 수술비가 없어 몸에 파편조각을 그대로 지닌 그는 아픔이 일상화되어 있는 듯했다. 지금도 이들은 자다가 총탄이 언제 벽과 창문을 뚫고 들어올 지 몰라 최대한 몸을 낮춰 잔다.
이라크에서 맞이하는 밤은 특별하다. 전화의 상처를 잠시나마 어두움으로 지우고 그 속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을 비롯해 인류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무거운 징표로 다가온다.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이자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땅, 이런 아름다움이 있었기에 신앙의 선조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던가.
태고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무엇보다 잃어버린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 이라크는 아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아픔을 나누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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