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부임 초부터 세례를 많이 주기보다 교회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당시 창녕본당 신자수는 창녕군에 180여명, 합천군에 120여명 정도였다.
공소에는 구 교우들이 있었지만, 창녕군에는 극소수의 구 교우들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천주교의 존재를 잘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일단 천주교를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부임 이듬해인 52년 3·1절 기념 행사가 「만옥정」이란 소공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면 의원인 김상수씨를 통하여 3·1절 기념행사에서 기념사를 할 수 있도록 섭외하였다.
수단을 입고 기념식에 참석한 나는 약 15분동안 기념사를 하고 나서 시가행진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한 것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기념식에서 끝에 연설한 사람은 누구인가? 목소리는 남자인데 왜 원피스를 입고 있는가? 천주교 신부라는데 천주교가 무엇인가? 등등 소문이 자자했다.
그때부터 군내 중고등학교 졸업식이나 기타 행사에, 그리고 군청, 교육구청, 경찰서, 심지어 금융조합(농협) 등에서 직원 연수회나 교육행사가 있을 때마다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년에 평균 10여회의 대외 강연을 5년동안 계속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성당 창고를 개조하여 「순화 유치원」을 개설하였다. 유치원은 물론 어린이 교육이 목적이지만, 자모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강좌를 통해서 많은 간부들이 입교하였다.
▲ 정하권 몬시뇰이 자신이 설립한 순화유치원 첫 졸업식후 졸업생들과 기념촬영했다.
53년 휴전 이후로, 자유당 정권의 전횡을 견제하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지방에서도 몇몇 유지들이 지구당을 결성하자고 제의해왔는데, 천주교 신부가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창녕 민주당 지구당 결성에 협조해 주었다. 이 일때문에 관에서는 나를 상당히 「거북한 인사」로 보기 시작하였다.
56년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성당신축 기성회를 발족하고, 57년 봄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완공은 후임 장주민 신부 때에 이루어졌다.
한편 서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서 근무하던 이종흥 신부가 파리에 있던 이영식 신부에게 부탁하여 유학의 길을 찾고 있었는데, 이 신부의 주선으로 스위스 프리부르그 대학교의 장학금을 얻어서 57년 8월에 이종흥 신부와 함께 스위스로 향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