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는 사소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외국생활에 적응하는 시기였다. 신학교에 기숙할 때에 주일에는 신학교 교수 식탁에서 식사를 했는데 2년동안 한번도 타인을 비방하는 대화를 들어보지 못했다. 참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교수단을 만나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59년 여름에 파리로 진출(?)하였다. 나는 소위 태중교우로서 어려서부터 교회 테두리 안에서 성장하였고 신학교를 거쳐서 사제로 살아왔기 때문에, 교회 밖의 사람들이 세상과 인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파리 대학교에 가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박사학위 논문에 대하여 합의하고 파리로 향하였다. 파리에서는 장학금 혜택을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파리 외방 선교회의 주선으로 파리 16구에 있는 성녀 요안나 샹딸 본당에 아르바이트하게 되었다. 2년동안 보좌신부로 살면서 파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에 아주 인상적인 것이 두가지 있었다.
요안나 본당은 3만6000명 신자를 사목하는 15년된 본당인데 주일학교 학생은 1000여명 정도였다. 이 본당 구역 안에 남자 수도원 분원이 17개였고 여자 수도원 분원은 더 많았지만 직접 본당 사목에 종사하는 수도자는 없었다.
▲ 파리를 방문한 전주교구장 한공렬 주교와 기념촬영했다. 왼쪽부터 백민관 신부, 한공렬 주교, 이종흥 몬시뇰, 필자.
또 한가지는 학교와 관계되는 것이다. 철학 첫 시간에 쟝기통 교수가 말하기를 서양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다 해버렸고, 그 후로 무수한 철학자들이 출현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붙였다가 뗏다가 뒤집었다가 물구나무 세웠다가 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더듬는 작업밖에 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 다음 시간에 실존철학자 쟝켈레비치 교수가 말하기를 자기 이전의 학자들은 철학이 무엇인지 더듬다가 말았고, 실존 철학만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주장하였다. 오 철학의 신비여!
본당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학교에 다니다가 3년째는 파리외방선교회 본부에서 기숙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여기서는 13구의 성요한 본당에 주일만 근무하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3년간 공부하면서 파리 국립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였다.
인상에 남는 것은 이 도서관의 고(古)문서고에 보존되어 있는 성토마스의 친필 원고를 구경한 것이다. 양피지에 기록된 성인의 필체가 얼마나 악필인지 도저히 해독할 수가 없었다.
▲ 스위스 프리부르그 성 빈첸시오 수녀원 지도신부 시절 때의 필자.
이런 일 중에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발현 사실에 대한 교회의 태도이다. 예를 들어 루르드에서 베르나뎃다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다는 사실은 베르나뎃다의 순직한 태도와 거기서 받은 메시지의 거룩함과 그 후에 따르는 여러가지 결과들을 고려하여 교회가 이 발현 사실을 인정할 뿐이지, 발현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적이라고 선언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격자의 증언을 존중할 뿐이다(파티마의 발현도 같은 맥락이다).
1858년에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처음 발현하신 이후로 오늘까지 150년 동안 신자 대중이 기적이라고 떠들었던 병자 치유사건은 2만건이 넘지만, 교회가 의학조사 위원회, 신학조사 위원회, 추기경위원회라는 3단계 조사를 거쳐서 기적이라고 인정하고 선언한 것은 60건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66년 7월에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여 당시 마산 남성동 주교좌 성당에 부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