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된 유래는 오로지 교회가 발전하였다는데 있다. 51년 서품될 당시에는 경상남북도를 관할하던 대구교구 소속으로서 경남 창녕에 부임하였고, 6년후인 57년에는 경상남도를 관할하는 부산교구가 대구교구에서 분립함으로써 나는 자동적으로 부산교구 소속이 되어서 유학길을 떠났다.
유학생활이 끝날 무렵에 마산 남성동 본당 신부로 발령이 났는데, 그 직후 66년 봄에 마산교구가 부산에서 분립됨으로써 나는 또다시 자동적으로 마산교구 소속이 되어서 귀국하였다.
▲ 필자가 당시 마산교구 주교좌인 남성동 본당 주임시절때 세례식을 가진후 신영세자들과 기념촬영했다(1968년 12월).
남성동 본당에서의 4년간은 내 평생의 가장 바쁜 시절이었다고 회상된다. 본당 생활의 일과는 오전중에 완월동 임시 교구청에 올라가서 교구 상서국장(문서담당)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지금의 사목국장의 일을 보고, 오후에는 본당에서 본당 일을 보는 것이 기본 일과였다.
그 시기는 공의회 직후였으므로 공의회의 정신과 내용을 공부하는 성직자 연수회가 교구별로 또는 관구단위로 자주 개최되었는데, 구내에서는 주로 진주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사제총회, 사제평의회, 사목협의회의 집회 장소였다.
관구 단위의 연수회는 부산 오륜대 명상의 집, 적기(현 부산 동항동)의 사랑의 집, 왜관 피정의 집, 대구의 여러 교회 기관들을 주요 집회장소로 이용하였다.
이런 여러가지 연수회에 강사진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느라고 진주 부산 대구 왜관을 얼마나 자주 출장다녔는지 지금 생각해도 본당 신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본당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예비신자 교리 강의를 성당안에서 했는데, 차츰 예비신자보다 기성 신자들이 더 많이 참석하게 되고 시내 다른 본당의 신자들과 수도자들도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소위 「예비신자 교리」에 대해서 개인적 지론이 있다. 예비신자가 배워야 할 것은 많고 항상 시간은 부족한데, 어떤 교재를 채택하든지 그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칠 필요는 없다.
세례성사를 받기에 필요한 초보적 신앙을 함양하는데는 기본 교리를 충분히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 구세주, 성령, 교회, 신망애 대신덕, 세례, 성체, 양심, 죄, 기도, 영생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기타 교리나 윤리나 실천 절차 등은 신자 생활을 하면서 배우도록 하면 된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모든 학생들의 심리는 교과서를 떼고나면 다 배운 것으로 착각한다. 세례를 받으면 교리공부를 졸업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움으로 대부분의 신입신자들이 더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예비신자 시기에 너무 많은 것을 이해도 못하면서 평면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해방후부터 한국교회는 외국에서 시작된 많은 신심운동을 도입하였다. 그런 개개의 신심운동은 신앙생활의 보조수단이지 필수 수단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목자들의 취향에 따라서 어떤 운동에 몰입하여 다른 운동을 배척하거나, 모든 운동을 강조하여 착실한 신자들은 여러가지 신심운동에 가담하여 생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분주하게 되었다.
모든 사목자들은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성사생활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신분상의 본분을 완수하도록 지도할 의무를 지고 있다. 신앙생활의 보조수단인 신심운동을 소개하고, 신자 각자의 처지나 소질이나 취향에 맞는 한 두가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보기에는 사목자들이 신자들을 너무 들볶는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택사항을 강요하는 것은 좋다고 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쇄신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시책을 강구하였는데 그중 한가지가 성직자들의 평생교육이었다. 그래서 한국주교단은 70년 가을 총회에서 가칭 「한국사목 연구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마산 장병화 주교님의 추천으로 필자를 사목연구원의 원장으로 지명하였다. 그래서 11월에 상경하여 서울교구 서우석 신부와 함께 주교회의 사무처 안에 임시 사무실을 차리고 사목 연구원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기관인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