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를 다룬 영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의 원작자이자 실제 모델인 헬렌 프리진 수녀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초청으로 11월 1일부터 3박4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2일 서울 명동성당과 3일 대구 성김대건기념관에서 강연회를 갖고 사형제도폐지운동의 당위성을 전한 헬렌 수녀는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헬렌 수녀의 방한을 계기로 사형폐지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는 장을 마련한다.
■ 헬렌 수녀 인터뷰
『십자가의 신비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를 제 손으로 못박는 사형제도의 문제점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헬렌 프리진 수녀(Helen Prejean?64?미국 성요셉수녀회)는 한국신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사형제도폐지운동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고해성사의 장이 되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로 말문을 열었다.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는 한국의 사형폐지운동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방한했다는 그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사형제도를 폐지해 아시아사회를 선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국내 사형폐지운동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지난 1981년 뉴올리언스주에서 빈민들을 위해 일하다 82년 한 사형수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계기로 20년 넘게 사형폐지운동에 헌신해오고 있는 헬렌 수녀는 그간 자신의 삶이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온 과정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수많은 사형수들이 영적 동반자들의 도움으로 영적 여정을 통해 새로 나고 있지만 우리 눈은 사형수들의 과거 모습에 머물고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가톨릭신자를 비롯해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인 미국에서도 사형제도가 폐지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그는 이 제도의 참모습을 발견하길 호소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펼치시는 사랑의 손길은 피해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가해자에게도 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면이 이런 진리를 애써 외면해온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들이 분노와 증오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헬렌 수녀는 『피해자 가족들을 보듬어 안는데 교회와 사회가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뉴올리언스에서 희생자 옹호단체인 「서바이브(Survive)」를 설립해 상담 등을 통해 희생자 가족들을 화해와 용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기도 한 헬렌수녀는 『사랑이 바탕이 된 용서만이 서로를 살리는 길』임을 역설했다. 아울러 그는 사형제도 존치를 주장하는 흐름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했다.
『형제의 잘못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헬렌수녀는 또 공동체가 딛고 선 「환경」이라는 울타리와 공동체의 책임을 무시하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개인주의 때문에 사형제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가해자 가운데 98%가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2%만이 사형선고를 받으며 더구나 부자인 경우는 아주 드물게 사형에 처해진다』며 미국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사형제도의 정치적 위험성도 경고한다.
『사형선고를 받는 이들 대부분이 흑인 등 유색인종이나 가난한 이들이라는 사실이 우리 사회가 지닌 또 다른 부조리입니다. 절대적 종신형이라는 대안이 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죄악이지요』
사형폐지운동이 힘을 얻어가기 위해선 사형제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나누고 알리는 공동체적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사형제도에 관한 지식을 쌓고 토론하며 인식을 넓혀 나갈 때 사형폐지운동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지평도 넓어질 것』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사형제도폐지는 인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모두가 평화의 사도로 나서길 기원한다는 헬렌 수녀는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었다.
■ 헬렌 수녀 강연 요지
피해자·가해자 모두 상처
용서만이 서로 살리는 길
그리스도교 신자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를 대하는 모습을 돌아볼 땐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의구심마저 품게 한다.
미사 때마다 대하는 십자가는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범죄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십자가의 신비를 알고 나눌 줄 안다.
사형폐지운동도 십자가의 이미지를 빌어 얘기할 수 있다. 즉, 십자가의 예수님은 한 팔을 펼쳐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보듬고 다른 쪽 팔로는 가해자를 품어 안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내가 경험했던 한 피해자 아버지의 모습은 진정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줘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외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후 아들뿐 아니라 가해자와 가해자로 인해 고통을 당할 가해자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용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용서를 통해 자신마저 죽이고 있던 증오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 신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게 됐다. 이렇듯 모든 피해자 가족들이 가해자의 사형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 가족의 아픔을 만들어내는 게 사형제도다. 지금껏 5명의 사형집행을 보며 사회가 원하는 것이 참사랑이고 정의인지 돌아보게 됐다. 감옥에서 영적 지도하는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수감자들의 「영적 변화」다. 사형제도의 문제점은 영적 여정을 통해 잡혀왔던 범죄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한 사형수는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낳지만 내 죽음이 피해자 가족에게 위로를 줄 수 있길 바란다』며 기꺼이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형제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인간을 판단할 지혜를 갖춘 양 행동하는 교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자들마저 이런 모습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함께 하며 자신의 잘못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많은 순교자를 낸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들도 사회의 그릇된 인식으로 죽음을 맞았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
현존하는 사형제도는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법이 아니라 복음이 더욱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예수님의 또 다른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앙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모습에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고 사형제도가 또 하나의 폭력을 재생산하는 현실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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