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서울 대신학교 교수 신부, 광주 대신학교 교수 신부, 서울 소신학교 신부, 본당신부, 사목 연구원장 등으로 지침서 작성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교육성성 기본 지침서의 내용에 따라서 위원들이 각 분야를 분담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전후 7차의 공동 토의를 거쳐서 가을 주교회의에 종합 시안을 제출하였다. 주교회의는 이 시안을 검토하여 교육성성에 제출하였고, 성성은 5년간 실시해 보면서 결정적 지침서를 작성하도록 인준하였다.
사목 연구원으로 말하자면, 국내에서 선례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선진교회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참고로 할 수 밖에 없었다. 71년 9월에 혜화동 교리신학원이 신축 낙성되면서 연구원이 교리신학원으로 입주하게 되었다.
마침 로마에서 세계 교리교사 대회가 열리는 기회에 김추기경을 수행하여 로마에 가서 대회에 참석한 후에, 유럽 여러나라의 신학교와 사목연수기관을 견학하러 나섰다.
먼저 라테란 대성전(로마 주교좌)옆에 있는 로마 교구청을 방문하였다. 나의 방문 목적을 들은 담당 몬시뇰이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하면서 약 100평이 넘는 사목 자료실을 보여 주었다. 그런 자료의 방대함과 잘 정리된 모습을 보고 놀라는 나에게 몬시뇰은 이 자료들이 충분히 이용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바티칸에서는 성직자 성성과 연학 성성을 방문하여 신학교 쇄신과 사제연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조언을 받았고,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역시 참고 자료를 얻어왔다.
로마를 떠나서 오지리 빈, 독일 뮌헨, 아욱스부르그, 베를린, 런던, 파리, 브뤼셀, 루뱅, 롯데르담, 프리부르그, 마드리드 등지를 돌면서 많은 교회기관을 방문하여 참고자료를 얻고 담당자들과 의견교환을 하였다.
귀로에 10일간 예루살렘과 성지를 순례하고, 마닐라 EAPI(동아시아 사목연구원)에서 상세한 조언을 받고, 동경의 상지대학을 거쳐서 만2개월만에 귀국하여 가을 주교회의에 연구 여행 보고를 하였다.
72년초에 서우석 신부는 정릉본당으로 전근가고 장익신부(현 춘천교구장), 정은규 신부가 새로 부임하여, 장신부는 연수계획과 섭의를 담당하고, 정신부는 사목잡지를 전담하여 잡지의 내용과 체제를 일신하였다.
그동안에 연구원 신부들은 서울 대구 광주 관구 연수회에, 그리고 서울교구와 몇몇 교구 연수회에 출강하면서 전국 사제연수에 대하여 그 지방 사제들과 상의하였다. 전국 연수회는 사제 서품 연차(年次)별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서 준비를 하였다.
▲ 1973년 5월 16일 수원 말씀의 집에서 제1차 전국사제 연수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부터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정하권 몬시뇰
연수 내용에는 신학문제, 사목문제, 교육문제뿐아니고 매스컴 이용, 강연요령, 대화요령, 신용조합, 농민문제까지 거론 토의되었고 실습과 시찰도 있었기에, 종합 평가 시간에 수강자들의 요망 사항을 다 합하면 사목연구원이 10개 있어도 다 수용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후에 서품 10년차 신부들이 참석하는 2차 연수회가 10일간 있었는데, 모든 면에서 규모를 축소하여 시행하였지만 분위기는 1차보다 산만하였다. 두차례 연수회가 끝나고서 나는 5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가을에는 자원하는 노장신부들이 참여하는 3차 연수회를 5일간 개최하였는데, 주로 교의신학, 윤리신학의 몇가지 과제를 논하는 것이었다. 서울대신학교 교수 신부들이 수고해 주었다.
가을 주교회의에서 3차례 연수회를 보고하였더니 주교님들이 판단하기를 현재의 한국교회의 능력으로는 본격적인 연수원 시설을 갖출 수도 없고, 재정 능력도 태부족하니, 사제 연수는 각 교구에 맡기고, 연구원을 CCK에 흡수하여 CCK를 강화하자고 결정하였고 따라서 나는 주교회의 사무차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CCK에 있으면서 가톨릭 대학과 교리 신학원 강의를 계속하였고, 여러 교구에서 하는 사제연수회에 출강하였고, 11월에 새로 사무 총장으로 부임한 이종흥 신부를 도와서 주교회의 규약을 개정하는 작업과 교구 행정 구조 재편 시안을 작성하였다.
74년 여름에 광주 대건 신학대학의 교수 부족 문제로 학사 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게 되어서 대구.광주 주교단이 여러번 회의 끝에 나를 차기 학장으로 지명하였지만, 수락을 망설이고 있다가, 75년 초에 주교회의 임시 총회에서 광주 신학교 문제를 논의하고 나를 학장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2월 5일 광주 신학교에 부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