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성모회는 영국 출신 메리 워드(1585~1645)가 1609년 프랑스 생토메에서 하느님 사랑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모여든 젊은 여성들과 함께 창설한 최초의 여자 활동 수도회다.
메리 워드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비추심은 영성사의 전환점이 된 은사였다. 곧 활동을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수도생활의 양식으로 도입해 사도적 여자 활동 수녀회가 탄생된 것. 따라서 동정성모회는 교횡직속 수도회로서 세상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체험을 세상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투신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메리워드가 창설 당시 예수회가 채택하고 있던 이냐시오 성인의 회헌을 따르라는 헌시를 받음으로써 「예수회」로 이름지었으나 당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해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친근한 벗, 동반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동정성모회」로 명명하게 됐다.
17세기 당시 영국 가톨릭 교회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왕권에 의해 국교로 선포된 성공회가 부흥함으로써 수난과 박해에 직면하게 된 가톨릭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많은 교회 단체와 수도회가 폐쇄당했다.
메리 워드는 21세 되던 1606년 예수회 홀트비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당시 스페인령 플랑드르의 작은 도시 생토메로 갔다. 그곳은 영국인들이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이주했던 영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유럽 대륙의 여러 도시들 중 하나였다. 가장 엄격한 수도생활을 원한 메리는 관상 글라라회에 입회했으나 이 봉쇄 수도원에 살면서 하느님의 현시를 받고 수도원의 문을 나서게 된다.
메리 워드가 받은 새로운 성소의 빛은 수도생활의 「거룩함」이 세상 안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즉 여자 수도자들도 봉쇄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에서의 활동을 통해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현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그 여성들은 수도자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의미의 수도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메리 워드와 초창기 회원들이 기소 당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성모회는 당시까지는 수도생활의 일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진 봉쇄 관상생활 보다는 내적 관상 결과로 교회에 봉사하는 사도직 활동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수도회 회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봉사하기 위한 영적인 자유, 진실(성실), 정의를 내적인 자질로 갖추도록 불림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메리 워드의 이러한 성소의 빛은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수도자의 호칭을 받을 수 없다는, 오로지 관상과 봉쇄만을 인정하던 당시 교회법에 크게 위배돼 결국 1631년 교황청은 이 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오던 동정성모회는 메리 워드 사후에 새로이 부활됐고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수도회의 기본 목표로 설정, 특히 여성들의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유럽 지역에서 최초로 여성들을 위한 근대식 학교 교육을 시작한 이 수도회는 여성교육의 전통을 확립하는 한편 전교활동과 의료사업 등 세계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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