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최영수 주교)가 오는 12월 19일 치러지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자질 검증을 위해 지난 10월24일 4명의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공개 질의서에 대한 답변이 최근 공개됐다. 외교, 남북관계, 인권, 복지, 지역갈등, 재해대책, 부패방지, 농업문제, 생명윤리, 주5일 근무제 등 10개 분야에 걸쳐 16개항의 질문을 담고 있는 공개 질의서는 신자들이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각 분야에 대한 후보들의 정견을 생명 윤리와 인권 등 가톨릭교회의 기본 가르침에 비추어 분석한다.
어떤 답변을 해올지 귀추가 주목됐던 이회창(한나라당) 노무현(민주당) 정몽준(국민통합 21) 권영길(민주노동당) 등 4명의 대통령 후보들은 정책 결정에 있어 국익의 관점을 가장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보였다.
이는 어떤 면으로 볼 때는 큰 무리수를 두지 않는 선택의 방법이라 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정치권의 여론선도 기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정치권의 역할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대선 후보들 가운데 일부는 사형제도 폐지를 비롯한 국가보안법 폐지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선 식견과 의지를 바탕으로 한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갖기보다는 「국민의 뜻과 여론」에 모든 책임을 돌려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해서 타 후보들은 소극적인데 비해 권영길 후보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40여개국의 사례를 들며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제시해 가장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폐지 의견에 대해서는 권영길 후보가 폐지, 노무현 후보가 대체입법을 내세운 데 비해 이회창, 정몽준 후보는 보안법의 필요성을 강조해 대조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교회가 큰 관심을 갖고 추진해온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권영길 후보는 교회의 입장을 거의 그대로 반영, 「제한적 감형 불허의 무기형」제도 도입을 통해 사형제도를 대체할 것을 주장한 반면 노후보는 폐지를 추진하되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 나가는 노력도 병행할 뜻임을 밝혔다. 또 이후보는 단계적 폐지, 정후보는 폐지를 주장해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사형제도 폐지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낳게 하고 있다.
복지분야와 관련, 정몽준 후보의 경우 수 차례의 사회단체 토론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책의 당위적 나열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표 흐름을 좌우할 여성정책에 있어서는 권후보의 정책이 특히 돋보였다.
모든 후보들이 여성권리 확대를 위해 영아보육이나 유아교육을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에서는 고민의 부족을 드러낸 데 비해 권후보는 「영아보육법」 「유아교육법」 등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생명윤리 문제와 관련, 생명공학 등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는 권후보를 제외하고는 모든 후보들이 대통령 예외권 조항 삭제에 반대하거나 유보적 입장을 보이는 등 교회의 입장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남북관계」와 관련,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한 노력을 묻는 질문에는 권후보와 노후보가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을 큰 방향으로 제시한데 비해 이후보는 핵 개발의 즉각 포기와 국군포로, 납북자 등 분단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인도적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고 있다. 또 정후보는 평화정착이 급선무라는 인식에 함께 하면서 대화와 교류를 최선의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SOFA문제와 관련해서는 모든 후보들이 SOFA가 미군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각론에 들어가서는 권후보가 미군에 대한 수사권 제한 조약 폐지와 미군을 철저히 감시하는 방안을 개선 방향으로 제시한데 비해 노후보와 이후보는 미군과 SOFA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염두에 두면서도 한·미 동맹관계와 한·미 우호협력관계 증진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또 정후보는 우리나라의 재판권 및 공동수사권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총평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입각한 정책 방안 고민이라는 잣대를 놓고 볼 때 권영길,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후보의 순으로 교회의 입장에 다가서 있다. 특히 재원 확보라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정책을 제시한 후보는 권후보다. 그러나 실현가능성과 일관성 등을 함께 고려할 때는 노후보 또한 교회의 가르침에 다가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이후보는 각론 분야에 있어서는 일부 교회의 입장에 서고 있으나 구체성이 부족했고 특히 「복지권」 「노동권」 등 현대사회의 시민권리와 관련한 분야에 있어서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이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대응이나 사형제도 폐지 등에서 나타나듯 「국익의 관점에서 볼 것」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모습은 교회의 가르침에서 비켜선 듯하다는 평이다. 정후보의 경우 전반적인 고민의 부재와 이로 인한 정책의 빈곤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공통적으로 대부분의 후보들이 구체적인 재정 확보 방안이 없는 정책을 나열하거나 설득력이 부족한 공약을 제시해 국가의 지도자라는 위상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표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질의서에 대한 답변은 월간 「사목」 12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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