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합의를 근거로 하여 춘천 수원 청주 안동 대구 부산 마산 전주 광주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들로서 교수단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교수단에게 신학교에 관한 교회법(현행 교회법에는 237조부터 264조까지)을 숙지하도록 요망하였다.
새학년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등교하자, 부제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지도권을 주어서 하급생들의 교내 생활을 돌보게 하였고, 당일 외출은 학생처장에게, 2일 이상의 외출이나 귀가 등은 학장에게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신학교를 맡으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선교 지방의 성직자는 기성 교회의 관리자이기 보다는 선교사로 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은 모든 성직자의 기본 본분이지만, 사목할 신자들을 모으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이 선교 지방의 현실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 필자(제일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광주대건신학대학 학장 재임중이던 75년 8월 25일 제7회 졸업생과 기념촬영했다. 이들은 필자가 학장으로 부임해 배출한 첫번째 졸업생들이다.
지성이 부드럽지 않으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하여 옹졸하게 된다. 또 의지가 나약하면 역경을 이기지 못하고 선행에 항구할 수 없게 된다.
6월부터 전교생에게 매주 2시간씩 노동시간을 부과하였다. 노동이래야 주로 환경정비를 하는 작업인데, 극기심을 기르고 노동자 농민들의 수고를 상기시키는 의미로 실시하였다. 매일 점심 후 한 학년씩 나와서 작업을 하는데, 학장은 거의 매일 학생들과 함께 하였으므로 「노동부장」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 시간은 학생들과 격의없이 접촉하는 시간이었다. 삽이나 호미나 괭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일을 성의없이 형식적으로 하는 학생에게는 『자네 일하는 모습이 처삼촌 벌초하듯 하네』하고, 아주 느리게 어정어정하는 학생에게는 『마치 죽은 게가 발 놀리듯 하는 구만』이라고 하면, 학생들은 무슨 뜻인지 다시 묻기도 하고, 알아들은 학생들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신학입문, 교회론, 구약의 교훈서 등을 강의하면서 행정업무를 보자니 과로해서 디스크에 걸려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완전 회복을 못하고 지병이 되었다. 학기 말이 가까이 오면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사람들은 방학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6년 사제 은경축을 맞이하였다. 본날이 9월 15일이나 학사 일정을 감안하여 10월 20일에 행사를 치렀다. 다섯 분 주교님들과 광주교구, 마산교구의 80여명 신부들과 많은 신자들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 공의회 이후 10년간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신학전망, 사목, 경향잡지 등에 기고한 논설들을 제자들이 수집하여 「교회의 쇄신」이라는 제목으로 400여쪽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은경축 기념 논총이 된 셈이다.
79년에는 「교회론」 제1권(교회에 관한 실증 신학)을 발간하였고, 제 2권(교회에 관한 교의신학)은 81년에 발간하였다.
만 5년간 학장직을 수행하고 79년 말에 사임하고도 평교수로 학교에 봉직하였다.
80년에는 소위 광주사태로 얼마동안 휴교할 수 밖에 없었다.
80년 여름부터 82년 여름까지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준비위원으로 위촉되어 10여 차례 서울 회의에 참석하면서 시간 절약을 위하여 야간 열차로 왕복하였다. 준비위원회는 사목회의, 기념사업, 기념행사 등으로 분과를 두었고, 나는 사목회의 분과에 참석하였으나, 82년 여름에 대구 신학교 학장으로 가게되어 너무 분주해서 준비 위원을 사퇴하였다.
대구의 선목 신학대학은 82년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받았고, 초대 학장 신부의 병고로 인해서 부득이 내가 영입되어 82년 7월 16일에 대구 신학교에 부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