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7월에 대구의 선목신학대학에 부임하면서 남다른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1945년에 성 유스티노 대신학교가 폐쇄되는 마지막 주간에 선배들과 함께 있던 막내둥이가 37년만에 다른 이름과 다른 모양으로 부활한 선목신학교의 책임자로 돌아왔으니 느낌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내 몸으로 유스티노 신학교와 선목 신학교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 셈이다.
선목신학교는 제1회 입학생 40명(대구, 마산)과 지도신부 4명으로 시작된 학교였다. 2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대들이 이 신학교의 최초 입학생들인만큼, 좋은 전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신학교 규칙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신학교의 규칙은 사제가 되기에 필요한 영성과 학문과 건강을 증진하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뜻이 교회를 통하여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성실하게 준수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니, 실수로 규칙을 어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규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생활은 공동체 생활을 질서있게 효과적으로 영위하는 것이고, 애덕을 수련하는 중요한 수단이고, 절제의 덕을 닦는 기본적 방법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한 공동체에 속하는 각자가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피차에 폐를 덜 끼치고, 각자의 영성과 면학과 건강을 서로 도와주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애덕을 증진시킨다. 또 규칙 준수는 사제 생활의 중요한 덕목인 절제의 덕을 실천하게 한다. 일반사람들이 정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성직자들이 자제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런 것이 성직자에게 반드시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을 잘못 반영하거나 남에게 악한 표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절제 생활은 성직자에게 많은 시간과 정력과 재물을 더 요긴한 일에 투입할 수 있게 하고, 성직자 자신을 단속하여 여러가지 유혹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기본 방침과 광주 신학교에서의 경험을 참고로 하여, 8년간 학장으로 그후 4년간 평교수로 봉직하면서 신학교를 제대로 형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는 중에 차차 학년과 학생이 증가하면서 책임자가 봉착하는 애로사항은 언제나 각 분야에 요구되는 인원의 부족 현상이었다.
신학교에 파견되는 교수신부들은 적당한 대우와 함께 적어도 10년 정도는 장기 근무를 하도록 배력해 주어야 하는데, 각 교구의 형편에 따라서 3, 4년이 멀다고 교체되는 바람에, 교수진이 안정되지 않고 교수가 전문가로 육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손해는 결국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신학교를 일반대학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신학교를 많이 세우지 말고, 몇군데로 학생을 모아서 운영하면 교수 부족이나 재정부족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신학교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신학교에서는 필요한 학과를 가르칠 뿐만아니라 신학생 각자의 영성생활과 인격함양을 지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25년간 신학교에 종사한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한 신학교에 200명 이상의 인원이 운집하면 원활한 개인 지도는 거의 불가능하다.
신학교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장래 사제들의 훈련소 내지 양성소이다. 무릇 특수 목적을 가진 인재의 양성에는 지식이나 기량의 습득만이 아니고 덕성과 인품의 함양이 아울러 요청되는 바이다. 덕성과 인품의 함양은 집단적 강의나 실습보다 개개인의 경우를 감안한 개별적 지도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매머드 신학교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간다. 25년동안 신학교에 봉직하면서도 사제로서 교수이기 전에 선교사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학장이나 보직 교수로서의 행정 업무를 보면서, 매학기 3과목 이상의 수업을 하면서도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일반 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교리 강의나 강론을 계속하였다.
대구 신학교에 12년간 있었는데, 방학이나 안식년에 초청받아서 미국 교포 본당들을 순회하면서 특강이나 피정 지도를 하였다. 83, 84, 90, 91년에 3~4주간동안 10내지 20개 본당을 순회 강연하였다.
특히 84년(200주년)에는 학기 중이었지만 뉴욕 교포 사제들의 초청으로 2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퀸즈 칼레지에서 기념강연을 하였고, 뉴욕주교좌 성당에서 거행된 기념 미사에서 강론을 하였고, 이 행사 전후에 미국 서부와 동부의 10개 본당에서 특강을 하였다.
87년에는 마산교구에서 고 정삼규, 김두호 신부와 함께 몬시뇰에 임명되었고, 90년 여름에는 8년간의 학장직을 사임하고 평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93학년말에 연령과 건강 때문에 신학교를 사직하고 은퇴하여 마산교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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