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두 주 앞으로 다가왔다. 국민들의 삶의 질에는 관심이 없는 정당간 야합과 담합, 집단 이기주의에 신물이 난 국민들의 정치 혐오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는 상대적으로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정의와 평화, 공동선의 증진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라고 할 때 최고의 정치행위인 선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다.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사회 참여, 정치 참여의 행위로서 선거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지난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총선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낙선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선거 참여 운동이었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되는 후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낙선운동을 펼침으로써 실제로 해당 후보자의 당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 운동은 법적 논쟁을 불러오는 등 많은 논란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수많은 시민과 단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치인을 뽑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가톨릭에서도 이른바 「천주교 총선연대」 역시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일익을 담당했고 특히 서울과 수원, 인천 등 전국의 100여개 성당과 전국의 총선연대 참가 단체들을 중심으로 약 3만여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부적격자 자진 사퇴와 선거법 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서명」에 참여했다.
천주교 총선연대를 비롯해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은 그 한계와 문제, 법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허무주의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시민들에게는 새롭게 정치와 사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주교회의 정평위를 비롯해 교회의 여러 공식 기구와 단체들에서 성명서와 유권자 행동 지침 등을 통해 신자들이 어떻게 선거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당부하고 나서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최고의 정치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선거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공동선의 추구와 실현이라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현세 질서의 쇄신과 변화를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 참여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의 정치 참여
『모든 국민은 공동선의 촉진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유 투표의 권리와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75항).
지난 2000년 천주교 총선연대의 발족과 활동을 둘러싸고 교회 안에서는 지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그것이 지닌 법적인 문제가 실제로 존재하며 교회가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도 있었다.
사실상 교회가 정치와 관련된 발언이나 행위를 할 때 이러한 지지와 반대의 견해는 상시로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독재정권 하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교회 안에서는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에 대한 찬반 양론이 대치돼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에 대해서 가장 간결하게 핵심을 말하고 있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제76항이다. 세밀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이 문헌은 교회의 원칙적이고 핵심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76항은 『교회는 그 직무와 권한으로 보아 절대로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아무런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며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분야에 있어서 서로 독립적이며 자율적』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종교 문제에 관해서 아무런 권한을 갖지 말아야 하고 국가가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려면 교회가 현세 질서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말아야 한다.
교회법 285조 3항은 『성직자들은 국가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는 공직을 맡는 것이 금지된다』고 규정한다. 이는 즉 교회가 정당들 간의 투쟁과 경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부당한 정치 참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사목헌장은 같은 항에서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인권 침해, 고문, 빈부 격차 등 불의를 비판하는 활동은 정치이기 이전에 복음화의 활동이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지지를 드러내는 정치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독재정권 시대에 헌법의 정교 분리 원칙을 이유로 교회의 정치 참여와 비판적 발언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헌법과 법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의 설정, 국가의 통치, 위정자 선출 등에 있어서 모든 국민이 아무 차별 없이 언제나 더 잘,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가능성을 제공하는, 법적 정치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인간 본성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특히 유권자들의 선거 참여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인 동시에 교회가 변함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즉 『정치 참여 자체는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사항』(지상의 평화 73항)이며 『모든 국민은 공동선의 촉진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유 투표의 권리와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사목헌장 75항)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어떤 정치 체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정당이나 후보자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한때 가톨릭 신자 후보자를 공공연하게 지지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가톨릭신자라고 해서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미 14년 전인 지난 1988년 8월 가톨릭신문사가 전국 16개 본당 1100여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가톨릭 신자 후보의 지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절반 이상이 「절대 반대」를 표명했다. 민도가 높을수록 공명선거 차원을 넘어 신자라는 이유로 교회 및 입후보자가 공개적으로 파당의식을 부추기는 행위를 매우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후보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교회가 끊임없이 강조하는대로 공동선의 추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최근 발표한 인권주일 담화문에서 『우리는 모두 정치 질서를 바로잡고 공동선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며 『대선에서 지역 감정이나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지도자를 선택하자』고 강조했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며 모든 국민은 공동선의 촉진을 위한 투표의 권리와 의무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 교회 선거 참여 변천사
“교회 대변자를 국회에 보내자”
광복 후 지금까지 교회가 선거에 임하는 자세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톨릭 대표를 선거에 내보내고 범교회적인 지지를 통해 신자 후보자의 당선을 이끌기도 했고 부정 선거에 반대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2월의 민주의원 구성과 같은 해 10월의 과도 입법위원 선거, 그리고 1948년 5월의 제헌의회 선거 등에 적극 참여한 교회는 민주의원과 입법위원에 가톨릭 대표를 추천해 당선시켰다.
1948년 5.10 선거에서는 가장 광범위한 참여가 이뤄졌다. 한 교구에서는 각 본당의 유지 교우들로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개별 본당 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한 가톨릭 관련 잡지에서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대변자를 국회에 보내자』는 제호로 자세한 투표 관련 내용이 소개됐다. 또 『가톨릭 신자는 이렇게 투표하라』는 기사를 통해 『교도로서는 교우에게 투표할 것이요 투표 선거구에 입후보가 없을 때에는 친종교적, 친교회적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한다』며 『교우들은 마땅히 단결해 투표함으로써 수립되는 정부에 교회적 색채가 반영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신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70년대 이후 교회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진 선거보다는 인권 수호와 정의구현의 적극적 체제 비판과 저항을 통해 정치 참여를 수행했다.
1980년대에는 노동자, 농민,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사회정의구현 노력이 절정을 이루고 급기야 한국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힘이 되어왔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한 4대 선거를 앞두고 각 교구와 주교회의에서는 금권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이 표명되었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인권주일 담화를 통해 정경유착을 최대의 문제로 지적하고 『공동선에 봉사해 민족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사람』을 뽑아달라며 『선거권을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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