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던 관악구 신림동 난곡마을이 철거되면서 이제는 서울에서 유일한 대규모 빈민촌의 이름을 이어받게 됐다. 4평 남짓한 무허가 주택들이 게딱지처럼 붙어있는 노원마을의 12월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찾아들던 자원봉사나 독지가들의 손길도 올해는 어쩐지 더 뜸하다. 워낙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운 탓이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에서도 온기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뭍」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면 허리 아래로 쑥 내려앉은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들이 쌓여있고 지붕에 걸린 연탄가스 배출기, 담벼락에 바짝 붙어 앉은 LPG 가스통들이 마치 60, 70년대 흑백사진을 방불케 하며 중랑천 건너 높이 솟은 아파트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눈깨비에 눅눅해진 흙탕 사이로 폭 60~70cm의 좁다란 골목길들이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뻗어있고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 더 스산하다. 머리 위로 낮게 널려 있는 전깃줄 사이 몇 채의 집들 사이로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와 비닐하우스들이 들여다보인다.
현재 마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900여가구 2000여명. 60년대 중반 이후 서울 영등포, 불광동, 청계천, 삼선교 일대의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밀리고 밀려 온 사람들이다. 인근 의정부의 장암지구 개발의 여파로 떠내려온 사람들도 있다.
올해 94세의 고순옥(아가다) 할머니도 바로 장암지구 개발로 살고 있던 집이 철거되면서 이주해왔다. 그때가 이미 20여년 전이다. 높은 연세이지만 혼자서 외출을 하지는 못해도 방안에서 쌓인 먼지를 손으로 훔칠 정도는 건강을 유지하고 딸, 사위와 함께 살고 있으니 그래도 나은 편이다. 하지만 사위가 남의 밭일을 하고 정부에서 나오는 20만원으로 근근이 이어가는 삶이 고달프기만 하다.
무려 33년 동안이나 이 마을에서 살아온 안경자(71) 할머니와 민용완(73) 할아버지는 그저 지금껏 그랬던 대로 이 마을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주민들이 최근 이곳에 임대 주택이 들어선다고 해서 마을을 떠나야 될지도 몰라 마음이 심란하다.
최근 서울시가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그린벨트 우선 해제 및 국민임대 주택 건립안을 심의, 결정한 바에 따르면 노원지구(노원구 상계1동 노원마을) 22만 3000㎡에 3080가구의 국민임대주택이 건설될 예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재개발지역이 그렇듯이 이곳 주민들은 재개발이 추진돼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돼도 입주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다시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노원마을 주민들은 상당수가 노인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마을을 떠났고 그래서 아이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관할 본당으로 지속적으로 노원마을을 지원해온 인근 수락본당의 구역장 윤춘임(로사)씨는 『젊은 사람이 구역장을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서…』라며 빨리 젊은 사람이 맡아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노원마을은 가난에 더해 매년 여름이면 수마로 거듭되는 고통을 겪어왔다. 지난 몇 해 동안에만 98, 99, 2001년 연거푸 세 번의 큰 수해를 당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98년 8월, 물에 잠겼다가 빠지기를 수 차례, 노원마을은 단 하나의 가재도구도 건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수마에 당해버렸다. 세간이라고 해야 낡은 선풍기에 비디오도 달려 있지 않은 조그만 TV, 오래돼 삐걱거리는 장롱에 낡은 옷가지들이 전부이지만 그나마 전 재산이었던 세간들은 분뇨와 흙탕물이 뒤섞인 황토색 물에 못쓰게 됐다.
천장까지 차오른 흙탕물에 가뜩이나 약한 지붕과 벽이 물러버린 탓에 씻어내려고 물을 뿌리면 물줄기를 따라서 벽에 금이 가버리곤 했다. 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터에 거듭 당해버린 재해에 주민들은 넋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전국에서 답지한 따뜻한 온정에 다시 일어서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주민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때 겪은 고마움은 올해 수해 때 성금 모금으로 이어졌다. 지난 8월 노원마을 300여 가구 주민들이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 남부지방의 수재민들에게 전해 달라며 240여만원을 노원구청에 전달했다.
지난 2000년 창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무의탁 할머니들의 공동체인 「베다니집」도 9월에 수재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25만원을 모아 성금으로 전달했다. 약값을 아끼고 먹을 것을 안사먹으면서 모아 낸 이 돈은 재산가의 수억 성금보다 큰 돈이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던(?) 판자촌들은 빠른 속도로 고층 아파트 단지로 대치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집단 주거 지역은 이제 전국적으로 몇 되지 않는다. 정치 민주화와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소위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이미 6년 전 일이다.
하지만 고도성장의 이면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바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층 아파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늘 한켠에 남아있는 이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데에서 희망을 찾기가 어렵다. 빈부격차, 이른바 80대 20의 사회 구조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하루가 될 것이라는 희망까지도 품기 어렵게 만든다.
『어떻게 되겠지요. 지금까지도 살아왔는데…』
애써 미소를 짓는 한 주민의 얼굴에는 그러나 삶의 무게에 눌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나서서 이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어야 할 것인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 더욱 스산한 노원마을 골목길.
■ 깊어지는 빈부격차, 20대 80의 사회
IMF 이후 분배구조의 불평등 심화
금융자산·부동산 극소수 계층 집중
빈민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가난이 구조화되고 있으며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절망적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과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빈부격차가 고착화되고 소위 20대 80의 사회가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성장은 눈부시게 이뤄졌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수출은 87년 473억 달러에서 2000년에 1723억 달러로 늘었고 국내 총생산 규모도 2000년 4617억 달러로 세계13위 수준을 기록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87년 161만대에서 지난해말 1291만대로 늘었고 전화보급률과 관련해 유선 가입자가 올해 2월말 현재 2288만명, 이동전화 가입자는 3월 기준 3000만명, 98년 등장한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올 10월말로 1000만명을 돌파, 세계 최고를 기록해 가구당 보급률이 절반을 넘어섰다.
하지만 97년말 IMF 경제위기 후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됨으로써 이른바 20대 80 사회가 빠른 속도로 현실화되고 있다.
분배구조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의 경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나타내는데 한국사회는 91년 0.274에서 97년 이후 급격히 상승해 지난해 0.359까지 올라갔다. 일부에서는 97년 이후 0.4를 이미 넘어섰다고 주장한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었고 실업자수도 97년 이후 100만명 수준을 넘나들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내놓은 「도시근로자 가계수지 동향」을 보면 분배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상위 20% 계층과 하위 20% 계층의 소득 배율이 올 3분기에 5.12배를 나타내 지난 2분기 5.02보다 커졌다. 특히 임대와 이자 등 자산 소득 격차는 더 커 배율이 무려 11.4배나 됐다. 고용 불안은 중산층과 서민층에 영향을 미친 반면 상류층은 금융과 부동산 자산의 운용을 통해 오히려 부를 더 늘렸다. 경제 위기가 끝났지만 이런 현상은 오히려 더욱 구조화되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자산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얼마전 한 은행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상위 20% 가구의 평균 금융자산은 2억1575만원으로 하위 20%계층 346만원의 무려 62배에 달한다. 또 상위 5% 계층이 개인 금융자산 총액 862조원의 38%, 상위 20%가 71%를 보유하고 있다. 93년 기준으로 국내 개인 보유분 토지의 28%를 상위 1% 계층이 가지고 있다.
부의 양대 축이라 할 금융자산과 부동산이 이처럼 극소수 계층에 집중돼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