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비평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비평」이란 말은 「비판」이란 말과 혼동하기 쉬운 말입니다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둘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첫번째 차이는 비판은 어느 한가지 관점에서 판단을 내리고, 흑백논리적인 사고가 지배합니다. 여기에 비해 비평은 한가지 이상의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이나 사건을 판단합니다. 여기서 다양한 관점은 충분한 근거와 다른 기준으로 지지될 수 있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나쁜가라는 질문에 비판적인 사고는 「예」나 「아니오」의 관점으로 답하는데 비해, 비평적인 사고는 「예」나 「아니오」로 답하기 전에 먼저 근거 있는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만일 전투 중이라면」, 혹은 「식인종 사회라면」 등 다양한 기준에서 비교 분석을 통해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비평은 하나 이상의 측면에서 무엇을 평가하고, 그 관점에 의한 평가를 부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비해, 비판은 어느 한 두 가지의 관점을 절대시하고 그것이 마치 전체인양 판단하는 편협한 판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건이나 인간도 어느 한 면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삶에서는 너무나 쉽게 어느 한 면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은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다른 면에서 반성해보는 삶의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부분입니다. 성모님은 요셉과 약혼한 시기에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아들, 즉 「메시아」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 소식에 마리아가 보인 반응은 『이 몸은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반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실망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라면 좀더 멋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후대의 귀감이 될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모범인 성모 어머님마저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을 때 의심하고 반문 할 수 있다면 우리같이 평범한 신앙인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 그리고 복음 후반부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신앙에는 「의심이나 반문」을 갖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재조명할 수 있느냐의 유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 후반부에는 네 친척인 석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을 극복하고 신앙의 단계로 넘어가는 성모님을 볼 수 있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석녀 엘리사벳의 잉태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3개월간 머무르며 아기 탄생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성모님이 자신의 신앙을 지지해 줄 근거를 확인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성모님이 가졌던 신앙의 위대함 몇 가지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모님의 신앙은 맹목적이거나 무조건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확인해줄 증거를 찾고, 확인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말씀을 증거해줄 근거를 찾기 위한 오늘의 노력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두번째로 성모님은 자신의 생각에만 얽매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화할 수 있었던 분이며,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다른 관점과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서두의 말로 표현한다면 비평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모님의 신앙은 「이해되지는 않지만 가능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인내의 신앙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마지막 사실은 「이해」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 신앙인들이 성모님을 보면서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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