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2천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가톨릭교회는 이를 언제나 자신의 소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해왔다. 15세기와 16세기, 교회를 거슬러 괴롭힌 종교개혁의 바람 역시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거대한 쇄신의 바람이 몰고 온 풍랑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거슬러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다시 말해서 교회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쓰라린 참회와 불만이 당시 교회 안에서 봇물처럼 쏟아졌다. 종교개혁 자체도 이러한 교회의 개혁 요구의 한 표현이었다. 교회 안에서 진행된 개혁운동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었다.
교회 개혁운동 급물살
교회 내적 개혁운동은 이미 15세기 초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은 개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했다. 마르티노 5세(1417~1431), 비오 2세(1458~1464), 식스토 6세(1471~1484)와 알렉산델 6세(1492~1503) 때에도 개혁이 시도됐고 율리오 2세(1503~1513)는 1512년 8명으로 구성된 추기경위원회를 통해 개혁안을 작성했다. 특히 레오 10세(1513~1521) 때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안이 제시됐다.
이러한 개혁 시도들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실천에 있어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들이 주도하는 개혁안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황들 자신과 교황청이 개혁을 관철할 만한 내적, 종교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개혁이 수행되지 못함으로써 이제는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직접 개혁에 나서게 된다. 15세기 가톨릭교회 안에서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만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당시 개혁의 시도들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독일에서는 열정적이고 유능한 많은 주교들이 개혁을 시도했고 각 수도회 안에서도 개혁에 열중했다. 수도회마다 개혁파들이 생겨났다.
황제 카알 5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해 역대 교황들과의 투쟁에 나섰다. 카알은 진작부터 공의회 개최를 주장했고 루터 역시 이미 1518년 공의회에 공소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사건을 공의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제기됐고 독일의 제후들은 지속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다.
카알 5세 공의회 주장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공의회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공의회 수위설에 대한 두려움과 교황령의 문제가 그 이유였다. 카알 5세는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와의 전쟁에서 승리(1526)한 뒤 독일로 가려했으나 프랑소아 1세가 재차 전쟁을 선언하고 교황이 그 편에 섰다. 카알 5세는 교황이 즉각 동맹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교황을 공의회에 출두시키겠다고 위협한 뒤 군대를 로마로 진군시켰다.
1526년 5월 6일 로마를 점령한 난폭하고 거친 스페인군과 독일 용병들로 인해 강도와 약탈과 살인이 몇 주간 동안 영원한 도시 로마에 만연됐다. 「로마 약탈 점령(Sacco di Roma)」은 대재난이었다. 그것은 교황청을 속죄와 회개로 경고하는 하느님의 시련이었고 로마의 문예부흥 활동을 종결시킨 동시에 개혁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됐다.
바오로 3세(1534~1549) 교황에 이르러 비로소 공의회와 개혁에 대한 전망이 밝아졌다. 교황은 일련의 개혁 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1536). 마침내 1545년 3월 15일 소집된 공의회 첫 회의가 12월에 이뤄졌다.
18년간 3개 회기로 실시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했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공의회는 3개 회기로 나눠진다.
제1회기(1545~1548)에서 교부들은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성서와 성전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아울러 성서의 해석은 교회만이 권위를 가짐을 명백히 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은총 절대설과 정의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규정했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이때 규정됐다. 첫 회기는 황제 카알과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됐다.
제2회기(1551~1552)는 바오로 3세에 이어 율리오 3세 교황이 즉위해 속개됐다. 1년여에 걸친 2기에서는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됐다. 2기에는 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결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통된 토론의 토대가 없었음이 명백해졌고 교황은 프로테스탄트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 토의하는 것을 금했다. 이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공의회가 중단됐다.
제3회기(1562~1563)는 가장 성과가 많았다. 2기가 끝난 뒤 10년 후에 이어진 제3기에서 가장 중요한 심의 대상은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대한 교리가 규정됐다. 그 외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교구 시노드,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됐다. 199명의 주교와 7명의 대수도원장, 7명의 수도회 총장들은 수많은 교령과 개혁령을 서명해 교황에게 보냈다.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 모든 교령과 개혁령을 예외없이 승인했다.
예딘(H. Jedin)은 공의회에 대해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 교도직의 대답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논쟁신학적인 대답이 아니라 교도직에 의한 가톨릭 신앙 교리에 관한 명확한 선언이요, 교회의 내부적인 자각이며 참된 종교개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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