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심상태 신부(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곽승룡 신부(대전교구 사목기획국장)
오랫동안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를 통해 한국교회의 토착화 작업에 진력해온 심상태 신부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의 통찰대로 아시아에서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A new way of being church)」을 모색하기 위해 토착화의 과제는 절대 절명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곽승룡 신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적 공동체 신앙 운동」으로서 토착화를 규정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작업이 동반되는 교회 전반의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고 말한다. 가톨릭신문은 지금까지 한국교회 토착화 작업의 현실을 진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토착화의 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교회 토착화의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신년 특별 대담을 마련했다.
토착화 작업의 시급성과 타당성
심상태 신부(이하 심) : 먼저 아시아 교회 시대로 일컫는 제3천년기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주제로 특집과 대담을 마련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와 경의를 표시합니다.
먼저 「토착화」가 어떻게 보편교회 안에서 타당성을 갖게 됐는지, 토착화가 왜 부수적인 사안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직결된 본질적인 과제인지를 살펴봤으면 합니다.
곽승룡 신부(이하 곽) : 토착화의 절대적 필요성은 복음화와 토착화가 동일한 신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이는 강생, 부활 신앙과 연관됩니다. 복음이 인간과 민족과 나라의 삶에 뿌리를 내릴 때 복음화가 이뤄집니다. 따라서 복음화의 문제는 토착화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토착화는 복음이 그 백성의 문화의 핵심을 관통하고 고양시키고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에게 새로운 복음적, 신앙적 가치를 제공할 때 발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을 비유와 징표와 역사를 통해서 전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화는 토착화요 토착화는 복음화입니다. 이러한 복음화가 이뤄지는 영역은 인간 삶 전체이지 어떤 한 부분일 수 없습니다.
심 :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 지역교회의 토착화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의회의 쇄신 노력의 일환으로 비서구 지역교회들의 토착화가 교도권에 의해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장려됐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교회들은 교회 생활과 신학을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 안으로 뿌리내리고자 시도했는데,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비서구 세계의 사회-정치적이고 종교-문화적인 맥락에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토착화가 오늘날 특히 중요하고 긴급한 요청이면서도 긴 세월을 요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토로하십니다. 특히 교회 역사에서 제1천년기는 동방 그리스도교가, 제2천년기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라틴 교회가 주도했으나 제삼천년기는 그 동안 주변부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교회들에 의해 주도될 것입니다. 한국, 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의 보전은 아시아 교회들의 중요한 과업이고 이는 토착화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의 토착화 작업
곽 : 한국교회는 1980년대 초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토착화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전에도 개별적인 연구와 제안이 있었지만 공적으로 교회가 토착화에 관심을 보인 것은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부터라고 봅니다. 이후 지금까지의 토착화 작업은 사상적 경향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정통 신학의 보편화 작업입니다. 섣부른 토착화에 앞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을 우선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문화 신학의 보편화 작업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문화 전통과 대화해 문화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작업으로 현재 한국의 토착화 연구에 해당됩니다. 여전히 모든 면에서 서구교회에 의존하는 한국교회는 우리 종교 문화전통이 토착화에서 더 많은 고려의 대상이 돼야 합니다.
셋째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벌인 역사적 예수를 중심으로 불의한 사회,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 현실과 대결을 시도하는 정치신학의 맥락화 작업입니다. 서구 정치신학과 남미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노선, 한국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농민회 활동 등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마지막으로 궁극적 보편적 실재인 하느님의 다양한 현현인 이웃 종교와 만나 서로 배우고 함께 성숙해가기를 시도하는 종교 신학의 비옥화 작업입니다.
심 :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이 토착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런 다짐이 문서상으로만 남아있고 구두로만 그칠 뿐 아직 한국교회는 진정한 토착화 작업을 깊이 수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들어 논의되고 있는 문제들, 즉 영세자 감소, 냉담자 증가, 청소년의 외면 등은 바로 토착화의 진정한 수용과 상관됩니다. 현안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토착화는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토착화의 방향과 전망
심 : 구체적으로 토착화 영역을 생각해보면 우선 전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전례의 토착화를 다루는 전문 상설기구가 필요합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부설 연구소가 있으나 상임연구원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교회의 차원에서 따로 설립하거나 또는 특정 교구가 설립해 범교회적 차원에서 관심과 지원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성의 토착화도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영성 빈곤이 자주 논의되는데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 안에서 이제는 수도회가 한국교회 영성 토착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특히 서구 영성을 전달하는 위치에 그치지 말고 동양의 심오한 영성적 자산들을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수용해 창조적으로 수용할 때가 됐습니다.
교회 구조의 토착화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행정가,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영성적, 사목적 과업 수행에 전념하는 교회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발전하고 성숙하느냐, 또는 서구 교회의 전철을 밟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앞으로의 방향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는 일선 사목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관리와 행정적인 문제는 일반 신자들에게 위임하고 전적으로 사목, 영성적 업무에 전념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조직 개편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젊은 세대와 비판적 지성인에게 외면당하면서 교회는 급격하게 침체될 것입니다.
곽 : 교회 지도층의 토착화에 대한 의지와 함께 실천적인 사목 정책 수립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학계와 연구 기관의 상황을 볼 때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 신학과 사목을 연결하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합니다. 사목현장에서는 신학적 연구 성과를 실현할 필요가 있고 신학 현장, 즉 학교와 연구기관에서는 사목적 체험과 실험이 고려된 연구와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연구 기관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요즘 여러 학회들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분야별로 토착화 연구가 병행된다면 좋을 것입니다. 교구별로 신학, 사목, 영성, 전례 등 다양한 양성 기관과 연구 기관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사제 양성 과정의 토착화 노력도 절실합니다. 신학교와 수도원의 양성과정에 토착화와 관련된 커리큘럼이 포함돼야 합니다. 양성과정에서 토착화가 인식돼야 사목현장에서 실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착화 학교」를 운영해 신자들의 후원과 양성에 적극 노력해야 합니다. 우선 몇몇 기관이 연대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을 준비해 점점 체계화된 토착화를 위한 연구, 실험, 양성 교육의 전문 토착화 학교가 요청됩니다.
심 : 아시아는 70년대 이래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를 통해 「아시아적 교회」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고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A new way of being church)」에 대한 결의를 나타냈습니다. 1998년 4월과 5월에 열린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아시아 특별총회에서 나타난 아시아 주교들의 입장을 보면 한국교회가 토착화에 임할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주교들은 아시아에서는 절대자와 유한자를 분리하지 않고 융화하는 포용적 사고가 더 일반적임을 지적했습니다. 남성적, 가부장적 신성이 아니라 포용적인 모성적 신성, 이를 반영하는 친교적 교회 구조를 강조했습니다.
또 서방 교회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데서 신앙이 영위되고 그래서 복음 선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반해 아시아는 진리를 듣기보다는 삶으로 체화된 진리를 봄으로써 진리에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은 지역교회-보편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돼 중심 교회가 지역교회에 지시, 명령하는 중앙집권적 구조가 아니라 지역교회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나아가 교회도 성직자와 평신도가 신분상으로 분리되고 상하 관계로 파악되는 전형적 라틴 교회의 구조보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뤄지는 친교적 공동체가 아시아 교회가 가져야 할 교회 구조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FABC는 삼중적 대화를 강조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아시아 문화,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라는 아시아적 교회의 기본 입장이 한국교회에도 적극 수용돼야 합니다.
본격적인 토착화 작업 시작돼야
심 : 토착화 문제는 정신적 자세와 관련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지도자들 역시 복음을 전통 문화 안에 뿌리내려 신앙과 전례를 토착화하겠다는 결의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왔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과 정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대담이 다시 한 번 교회의 미래를 위해 토착화가 필수적인 과제임을 상기시키고 토착화의 과제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곽 : 토착화는 말 그대로 「땅에 뿌리내림」입니다. 백성들의 삶 안에 복음의 메시지가 뿌리내리게 하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 학자와 관계자들만의 작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작업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발표된 토착화 작업들이 교회에서 실험되고 검증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교회와 수도회 장상들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고 신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토착화는 신앙인들이 복음 안에서 세상을 사회적,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적인 공동체 신앙운동이 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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