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의 형상을 새겨 그리스도교인들을 색출하는데 쓰여진 동판화인 후미에. 이로 인해 1614~1635년 사이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서만 통계상 28만여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이웃 일본의 가톨릭 신앙도 우리네와 비슷하게 신앙선조들의 순교의 피 위에서 더 굳건해졌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의 피해지로 잘 알려진 나가사키는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곳이며, 일본에서도 가장 많은 신자와 성지가 있다.
일본교회의 시작과 성장, 고난의 과정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나가사키의 성지들을 찾아봤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나가사키현. 비행기로 한시간 남짓 날아 도착한 이곳은 아열대 기후로 겨울에도 성지순례하기에 부담없는 포근한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나가사키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우라카미 성당이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붉은 벽돌의 성당은 1925년 완공 당시 동양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현재 성당은 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의 폭격으로 기둥만 남아 1959년 재건된 것. 폭격의 잔해, 원폭으로 녹아버린 묵주, 그을린 성물 등이 당시의 처참함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이 성당은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가까이에는 원폭기념관과 평화의 공원이 있다.
▲ 우라카미 성당. 원폭으로 부서진 성당들이 성당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 26위 순교성인 기념비
기념관 내에는 순교자들의 유골과 유품을 비롯해 일본 초기교회 유물과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사료 등이 전시돼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십자가를 목에 건 관음보살상이었다. 당시 신자들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관음상을 마리아상처럼 생각하고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나가사키 시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성지로 또한 오우라 성당을 꼽을 수 있다. 순백의 몸체, 푸른빛의 첨탑이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오우라 성당은 프랑스와의 우호조약으로 외국인의 종교자유를 얻은 후 26위 순교성인을 기리고 외국인의 종교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1865년에 지어졌다. 고딕양식 목조건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돼 국보로 지정돼 있다.
오우라 성당은 가꾸레 기리시땅(숨겨진 신자)의 발견 사건으로 더욱 유명하다. 성당이 건립된 해 3월 17일 여자 3명이 성당 앞을 지나면서 이곳 사제에게 「당신과 우리의 믿음은 똑같다」라고 말함으로써 250여년간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을 다시 찾게 되었다. 성당의 보호를 위해 현재 본당 신자들은 따로 마련한 성당에서 각종 전례를 거행하고 있지만, 매년 3월 17일과 성탄 밤미사는 본 오우라 성당에서 봉헌하고 있다. 마침 기자가 방문한 날이 주일이어서 본당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했는데 이들과 나눈 대화에서 다시 찾은 신앙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 일본 최고의 고딕양식 목조건물인 오우라 성당 전경.
지옥열탕이라 불리는 이곳 유황탕은 박해 당시 배교하지 않은 많은 신자들의 생매장터였다. 신자들을 굴려 유황탕 속으로 밀어넣은 언덕에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운젠성당에서 이곳 순교비까지 일명 지옥순례와 함께 순교제를 펼친다.
나가사키 지역민들의 굳건한 신심의 흔적은 시마바라 성의 가톨릭 사료박물관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 운젠지옥열탕에 빠져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순교비.
우리나라의 여느 풍경좋은 시골과 흡사한 모습의 시마바라 지역. 그 평화로운 풍경에 수만명이 순교한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현재까지도 발굴되고 있는 순교터가 박해의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교회보다 450여년 앞서 시작된 일본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무참한 박해 이후 2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교회 공동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은 이후에도 다시금 초기교회의 활발한 모습을 찾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적은 수지만 대부분 신자들은 대대로 내려온 깊은 신심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최근 나가사키 대교구는 물론 일본 내 각 교구들은 한국교회의 소공동체 모임 등을 도입해 교회 공동체 활성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또 지방정부 등에서도 순교성지 보존과 성지순례 지원방안 등을 모색하고 있다고. 선조들의 순교신심을 밑거름으로 일본교회가 더욱 활발한 공동체로 자리잡고 그 평화의 기운을 더욱 멀리 뻗치길 기대해본다.
나가사키항 입구,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태평양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성모상의 인자한 모습이 순례의 긴 여운을 평화로 감싸고 있었다.
▲ 나가사키항 입구에 세워진 대형 성모상
일본교회의 시작은…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가톨릭 신앙이 전해졌다. 지방 영주의 개종 등에 힘입어 당시 신자수는 30만을 넘어서는 등 교세가 급성장했으나, 1587년 총집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교령을 내리면서부터 무참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250여년간 일본교회는 침묵했다. 개화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숨어서 신앙을 이어온 신자들이 발견됐고, 새롭게 교계제도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16개 교구 신자수 50여만명의 교세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