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가라』면서 『사회학을 전공하라』시던 고 최덕홍주교님은 분명 선각자라고 생각한다. 그당시 국내에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없었다. 그리고 사제로 살아가는 동안 사회학을 전공한 것을 감사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유학 갈 시점은 6?25 전쟁 와중이라 미국비자를 발급받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중이라 젊은 사람은 모두 징집대상자였기에 해외여행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나는 신학교 졸업무렵 그러니까 1945년 5월에 일본군 제1회 정병으로 소집돼 현재의 일본 나리따공항 자리에 주둔한 전차부대에 복무했었다. 본토방위를 위해 만주에서 철수한 관동군소속 마지막 전차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다가 8월 해방후 그해 10월쯤 전역과 동시에 귀국했었다.
아무튼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 정재석 신부님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1년정도 걸려서 미국유학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부산에 와 계시던 장면 박사를 통해도 안되던 것을 주일미사 참례차 성당을 찾아온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중장)을 통해 당시 국방장관이던 이기붕씨의 허락을 얻어 미국유학 비자를 얻게 된 것이다.
고 장병보신부님의 전송을 받으며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 미국유학길에 오른 것이 1952년 9월이었다. 그런데 이때 타고간 비행기가 프로펠러기였기에 연료주입을 위한 중간기착을 수없이 되풀이한 끝에 미국에 도착했다. 부산 수영-일본 동경-홋카이도 순서로 날아가던 비행기는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까지 가면서 섬마다 내려앉아 기름을 넣는등 미국본토 도착까지 며칠이 걸렸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착륙하자 정비를 위해 하룻밤을 자야만 했다. 이때 생전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실을 경험했는데 요강같은 곳에 볼일을 보고는 옆에 붙어있는 버턴을 누르자 갑자기 「쏴악」하는 물소리에 깜짝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인 위스컨신주 밀워키 소재 마케트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의 첫 강의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해 혼이 났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젊은 미국대학생들은 교수의 강의와 더불어 고개숙여 필기를 하는데 나도 고개숙여 공부하는 척 편지를 쓰던 기억이 새롭다.
이날 첫 강의를 듣고난 후 『유학 가라』는 주교님 말씀에 『예』라고 무조건 순명했던 것이 무척 후회되기도 했다. 이때 평생을 노력해도 강의를 받아 적기는 불가능 할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때의 고생경험 때문에 지금도 「밀워키」라고 하면 독특한 미국의 냄새가 아직도 느껴질 정도다.
밀워키에서는 인근 노틀담수녀원 기숙사에서 버스로 통학했다. 그런데 유학 초기 거처하던 이 수녀원에서는 두 분 사제와 함께 숙식을 같이했는데 첫날부터 사나흘 정도는 매 끼니마다 나오는 식빵을 5~6개씩 먹으니까 나이 든 사제가 놀래서 『이신부, 그렇게 많이 먹어도 되느냐』며 걱정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1년6개월 정도 영어습득을 위한 마케트대학 청강생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 진학문제를 알아보니까 「사회학」 석?박사 코스가 있는 뉴욕의 포담대학을 추천받아 뉴욕으로 옮겨 본격적인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교육은 입시지옥이다, 공교육이 무너진다며 걱정하는 소리가 크지만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는 참으로 엄격하다. 미국의 경우 고등학교때 까지는 별로 공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고교생까지 미국 아이들은 아주 유순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지독스럽게 공부한다. 어느 대학이든 일단 입학한 후 한 과목이라도 낙제하면 퇴학당한다. 대학원에서도 매일 출석을 부를 정도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아예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장에 취직하는 등 사회로 진출한다. 이런 풍토에서 외국인 유학생의 경우 본토인보다 3~4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스물아홉 나이에 유학가서 30대에 공부를 시작한 나로서는 참으로 힘든 과정을 거쳐 학위를 따냈다.
석사학위 취득은 24학점을 취득해야 하고, 학점 취득후 전과목에 걸친 종합시험과 논문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종합시험 전과목 점수가 B+ 이상이어야 박사학위 코스를 밟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박사학위를 따려면 36학점을 취득해야 하고, 종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다 석?박사 코스중 불어와 독어 번역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실패한다. 같이 공부하던 중국신부는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도중하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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