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에게 철학한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조금도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한 몸 안에서 「철학자」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증언하는 「순교자」의 삶이 동시에 꽃피어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트리폰과의 대화」는 그가 그리스도교 안에서 충만한 진리를 만나게 되기까지 걸었던 여정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추구하는 사람의 여정이 흔히 그러하듯 당대의 여러 학파를 기웃거렸다. 스토아 학파와 소요(逍遙)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를 두루 거치며 배우던 유스티누스는 어느날 해변을 걷다가 도인풍(道人風)의 신비로운 노인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충만하고 참된 지혜이신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된다. 노인은 유스티누스가 마지막으로 심취해 있던 플라톤 철학이 결코 자기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면서 성서의 예언자들을 길잡이로 삼으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누구를 높이 보거나 두려워함도 없이, 그리고 영광을 얻으려는 욕구에서도 자유로이, 진리를 보고 선포할 수 있는」인물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노인과의 만남에 대하여 후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후 나는 그 노인장을 다시 뵙지 못했지만, 내 영혼 안에 어느듯 불꽃이 이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른의 말씀을 속으로 곰곰히 되씹으면서, 이 철학이야말로 참되고 유익하며 유일한 철학이라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되었고, 또 이런 이유로 (비로소) 나는 철학자가 된 것이다. 모든 이가 나 비슷한 체험을 해서, 구세주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트리폰과의 대화」 8). 이처럼, 진리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과 추구가 그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원리나 이치로서의 진리를 넘어서, 드디어 「어떤 분(위격)」이신 살아있는 진리,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하신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대략 이런 경위로 그는 130년 경 에페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그리스도교를 열렬히 전파하고 옹호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참된 철학」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철학자」로 생각한 나머지 당대의 철학자들이나 순회 교사들이 착용하던 망토(pallium)를 걸치고 다녔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교사요 집필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유스티누스는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의 로마 집정관 유니우스 루스티쿠스에게 고발되어 6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로써 그는, 한참 후배뻘 되는 또 다른 그리스도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55)가 진리를 두고 갈파한 바 있는 무시무시한 깊이의 경구(警句)를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진리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되는 데 있다」
▲ 진리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과 추구가 유스티누스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해 주었다.사진은 유스티누스의 저서 「트리폰과의 대화」필사본(1336년).
그리하여, 예리하고도 신중한 신학적 분별 아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와 이 땅에서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성숙해야 할 깊이있는 토착화 작업 및 참신한 「문화의 신학」을 위해 든든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 시대에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 종교간 만남과 대화의 성숙을 위해서도 의미심장한 착안점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