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교리적 가르침을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 적응해 선포하고 가르치며 실천하는 방식과 형태들은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로마 교회, 서구적인 교회의 모습 그대로 2천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수와 초기 교회
우리가 성서에서 익히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일종의 「문화 융합」(acculturatio)의 방법을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토착화와 관련되는 서구 용어들, 즉 문화 융합, 문화 순응, 본방화, 상황화 등 중에서 문화 융합은 상이한 문화들의 접촉을 통한 상호 작용과 그 결과를 지칭하며 이 경우 주체가 되는 문화와 예속되는 문화가 상호 교환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당시 로마 제국 영역 안에서 유다교적이거나 이교적 문화와의 융합을 통해 사회적, 종교적 행위나 표현이 지니고 있는 비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화시켜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교적인 종교적 상징들이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변화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 융합의 예를 우리 교회에서도 직접 볼 수 있다. 즉 서구 교회에서는 성당에 들어가 성체에 대해 경의를 표시할 때 무릎을 꿇어 장궤를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존경을 표시하는 예로 허리를 깊이 굽힌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 융합의 한 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 성당서 장궤 서구에서 성체 공경의 예인 장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교회에서는 전통적 존경의 예로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예절로 변화됐다.
즉 유다 사회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를 설립하고 이 예식에 자신의 희생과 구원의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파스카 만찬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전통적인 축제이다. 예수는 유다인들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상징하는 이 만찬의 양식을 이용해 전 인류가 자신의 구원 성업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성사로 설립한 것이다.
세례 의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세례자 요한 과 쿰란 공동체에서 회개의 표시로 이뤄지던 세례 의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즉 세례 의식은 이제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성사라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 최후의 만찬 예수는 유다 사회의 전통적인 파스카 축제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를 설립함으로써 유다교 전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 융합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지역에 깊게 뿌리박고 있던 유다교 전통에 따른 율법을 그대로 준수하고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이 회의에서 이교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율법들을 그대로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로는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의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했던 멍에를 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 것입니까? 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주 예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지침을 따랐다.
결국 유다인들이면 누구나 준수해야 했던 할례에 대한 규정과 모세법 규정은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복음이 로마 문화권에 전파되면서 교회 안에서는 이른바 「문화 순응」(enculturation)이라고 할 수 있는 토착화의 또 한 가지 형태의 과정이 성립된다. 2세기와 3세기를 걸쳐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이 과정을 통해 복음의 진리는 로마 문화권에 적응된다. 문화 순응은 아직 고유한 문화를 지니지 않은 사회적, 종교적 집단이 이미 형성돼 있는 특정 문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법률가 출신의 떼르뚤리아노(160~220)는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 법률 용어들을 활용했다. 즉 계약이라는 법률 용어를 원용해서 세례성사는 세상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법률적 차원의 일로 설명했고 이러한 설명은 로마의 법률 용어에 친숙했던 로마인들에게 복음과 신앙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나아가 교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잡은 뒤 로마 제국의 정치 및 사회 제도와 질서를 수용하는 문화 순응을 통해 제도적 종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때 로마의 제국법과 제도를 바탕으로 거의 그대로 원용된 각종 교회법과 교계제도의 틀들은 지금까지도 가톨릭 교회의 기본적 요소들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전까지 각 가정에서 조촐하게 거행되어온 전례는 로마 제국의 거대한 성전 안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거행되기 시작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절대 군주제의 정치적 권력과 권위를 보유하며 결과적으로 성직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위를 받아들이면서 봉사와 헌신이라는 복음적 생활의 실천에는 다소간 미흡한 경향을 띠게 된다.
아울러 로마 제국의 법률주의가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죄는 친교와 일치로 특징지어져야 할 공동체 구성원간의 사랑과 신뢰를 훼손하고 공동체와 하느님 사이의 계약 관계의 손상으로 간주됐었다. 그런데 로마 제국 당시부터 교회 안에서 죄는 신법과 교회법의 파기라는 법률적 개념으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여러 학자들은 당시 교회가 로마 제국의 지배적 문화에 순응, 위계질서로 구성된 사회질서와 체계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이를 근본적인 복음적 가치와 척도로 엄정하게 평가하는 일에 소홀했다고 말한다. Y. 콩가르(Y. Congar)는 『일치와 획일성을 혼동해 보편교회를 로마교회의 단순한 연장으로 간주하면서 어디나 로마 관습과 의식들을 부과하려고 꾀한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385년 교황 시리치오와 416년 교황 인노첸스를 언급, 『로마의 관습과 예식들을 추구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베드로의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부당함을 지적했다.
선교 지역의 토착화
16세기 이후 가톨릭 교회는 비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의 선교 활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교 지역 교회의 「본방화」(indigenization)를 통한 토착화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본방화(本邦化)는 전통적으로 토착화를 뜻하는 의미로 널리 사용됐던 용어로 그 유래를 보면 인도에서 식민체제를 굳히려는 의도로 실시됐던 고도의 식민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은 통치 체제 안에서 인도의 토착 요소들을 어느 정도 장려하고 수용하며 인도 본방인들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둔화시켰다.
교회 안에서 토착화와 관련해 사용되는 본방화라는 용어는 서구적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비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서 교회를 정착시키기 위해 토착 문화의 요소들을 수용하고 방인 성직자들을 육성해 외면적으로 토착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1658년 5월 당시 포교성성은 교황 알렉산더 7세에게 중국 서부와 남부 선교 책임을 진 주교를 추천했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1659년 이들은 성성으로부터 특별한 지침을 받았다. 즉 『귀하가 가져가야하는 것은 귀하의 나라가 아니라 신앙』이라며 서양의 관습이 선교지에 그대로 이식되어서는 안되고 토착 관습들이 채택되어 선교 지역의 교회가 「본방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도15세는 1919년에 반포한 교서에서 선교활동의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했다. 교황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출신국을 잊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선교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책무, 방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 외국 선교사들에게 요청되는 무사공정성과 그 지역 나라에의 온전한 순응 등을 강조했다. 교황 비오11세도 1926년에 반포한 회칙 「Rerum Ecclesiae」에서 방인 성직자의 역할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외국 수도단체보다는 지역 조건에 더 잘 순응하는 새로운 수도 단체들의 창설을 촉구했다.
비오 12세는 1939년에 반포한 회칙 「Summi Pontificatus」에서 선교 지역의 국가들 안에서 교회가 토착 문화에 적응해야 함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모든 민족의 문화적 유산을 보전하고 계발하며 이를 수용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교령들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서의 공자와 조상 공경, 국가 축제와 관련된 예전과 의식들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이를 통해 오랫 동안 계속됐던 중국 전례 논쟁이 마무리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방인 성직자 양성을 촉진하고 본방인 주교들의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민족들의 영적 가치가 교회 선교 활동 안으로 수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아울러 1944년 교황청 선교사업 책임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각 민족의 특수한 성격과 전통, 관습들은 신법과 모순되지 않는 한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선교 지역 교회가 더욱 적응 원리에 의지하게 될 것임을 지적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특히 1951년 반포한 교서에서 『교회는 풍요한 숲을 무모하게 베어서 황폐화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적함으로써 토착 문화의 보전과 육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그리스도교적 문화 융합의 원리를 설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후
마침내 1962년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고 3년여 동안 열렸던 이 공의회는 쇄신과 적응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훌륭하게 부응함으로써 교회의 내적 쇄신을 기하고 현대 사회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교회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져오던 토착화의 필요성을 결정적으로 확인하고 모든 교회가, 특히 선교 지역의 교회가 토착화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시대적인 요청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토착화 작업을 훌륭하게 이뤄냈던 현대 한국교회의 토착화 작업은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