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내가 신학교 입학할 때부터 최근까지 「동안(童顔)이라는 말을 많이들었다」고 밝혔지만 미국 유학시절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유학기간중 1~2년 차이로 함께 미국에 공부하러 오신 고 장병보 신부님과 김추기경님의 형님이신 고 김동한 신부님과는 방학때 가끔 같이 만나는 기간이 있었다. 이때 찾아간 미국신자 가정에서 자매님들은 두분 신부님께만 둘러앉아 얘기를 주고받고는 헤어질 때쯤 나에게는 『신학생은 언제 부제품받아요?』라고 질문할 정도였다. 이 모두가 내가 어리게 보인 덕분에 생겨난 에피소드다.
한가지 더 밝힐 것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정식 생일은 19번 밖에 지내지 못했다. 내 생일 2월 29일은 4년마다 한번씩 돌아오기 때문이다. 평생 나와 같은 생일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은 미국 유학시절 만난 어느 할머니 한분 뿐이다. 서울 신학교 입학 당시 면담때 서울교구장이시던 원라리보주교님께서 내 파일을 보시면서 『가별 신학생! 지금 몇살이며, 생일은 언제?』인지를 묻길래 그때 나이를 말하자 『틀렸어요, 틀렸어요. 가별학생은 4년에 한 살씩 먹는 사람이에요』라고 일깨워(?)주셨다.
미국유학 시절 만난 그 할머니는 9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내 생일 때면 매번 카드를 보내주고 있다. 내 논문을 타이핑해주시던 그 할머니는 당시 미국 유명보험회사 인사과장을 역임한 엘리트였는데 본당에서 재무부장을 맡기도 한 열심한 신앙인이다.
각설하고 유학을 마치고 로마를 거쳐 귀국 길에 태국 방콕에서 하룻밤을 자게됐는데 너무 더웠다. 방콕에서 고생한 덕분에 다음 행선지인 마닐라가 방콕보다 더 덥다는 말을 듣고는 마닐라행은 취소하고 홍콩-동경을 경유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 첫날 혜화동 신학교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열차편으로 대구역에 당도하니까 뜻하지 않게 교구장이신 고 서정길 대주교님을 비롯한 교구 사제 대부분이 나와서 나를 환영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로서는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신부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당시 교회 어른들께서는 미국보다는 주로 유럽쪽으로 사제들을 유학보냈다. 아마 이것은 미국은 좋은 문화보다 나쁜 문화가 많은 버르장머리 없는 나라로 알고 있는 점과 아무래도 교황님이 계신 로마와 유럽쪽이 가톨릭문화가 확산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온 사제가 드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로마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고 정규만 신부님과 프랑스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딴 고 윤을수 신부님 이후 내가 외국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꼽힐 것이다. 미국에 유학간 신부로는 물론 내가 최초였다.
아무튼 내 자신 놀랍고 감사했다. 즉석에서 미국 다녀온 소감을 한마디 하라고 해서 감사의 인사말씀을 간단히 끝내자 고 강찬형신부님이 『빠다물 먹었다고 혀가 돌아가네』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 1961년 3월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하고 있는 필자(왼쪽).
이 무렵 공부를 마치고 독일에서 귀국한 후 가톨릭신문사 주간을 맡은 김수환 추기경님과 교구청에서 숙식을 같이했다. 가끔 한가할 때는 김추기경님과 바둑을 같이두던 일도 생각난다. 또 고 이명우 신부님도 함께 교구청에 근무하셨는데 이신부님은 나만 보면 영어 가르쳐달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신부님은 영어공부에 매우 열심이었다. 어느날 아침 대구교구청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뒤따라 들어온 이신부님이 바로 옆칸에서 어제 저녁에 가르쳐 드린 영어를 중얼중얼 외울 정도로 영어공부에 열성을 쏟았다.
사제품 받을 당시 고향본당 주임사제였던 이명우 신부님을 생각하면 6?25전쟁으로 같이 걸어서 울산까지 피난갔던 기억이 떠올려진다. 방학을 맞아 영천성당을 찾았는데 영천은 때마침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라 이신부님과 함께 영천에서 포항으로 피난을 갔다. 포항에도 인민군이 처내려와 다시 포항에서 구룡포를 돌아 울산까지 걸어서 피난다닌 기억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