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본격화 조짐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활성화되고 있는 일치 운동에서 고무적인 것은 지금까지 터부시되거나 회피됐던 신학적인 대화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평의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회원 교단들의 일치운동 관계자들이 뜻을 모아 시작한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회의」는 다만 사회적인 이슈들을 중심으로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측면 외의 본질적인 부분들에 대한 논의들을 본격화하고 있다. 일치회의는 지난해 2월 처음 구성된 후 8월 30일에 신학자 모임을 갖고 일치를 위한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 연구 모임을 상설화하도록 노력하기로 하고, 특히 신학 포럼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에 앞서 2000년 대희년에 두 차례의 신학 포럼이 열렸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내 각 교파간의 신학적인 견해 차이와 신학대화에 대한 접근 방식의 상이함으로 인해 후속 포럼으로 연결되지 못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합의는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일치회의는 이어 11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양측 실무자와 신학자 30여명이 모임을 갖고 교회 일치 운동 관련 문헌들을 신학적으로 검토한 뒤 오는 5월에 「구원론」을 주제로 본격적인 신학 포럼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이러한 일치회의의 활동은 지난해 12월 16일 최기산 주교를 비롯해 가톨릭과 개신교 각 교단 지도자들이 참석한 간담회를 통해 공식 추인을 받아 명실공히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일치 운동을 선도하는 기구로 인정받음으로써 신학 대화는 더욱 힘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다양성 속의 일치
교회 일치 운동의 기본적인 정신은 「다양성 속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오랫 동안 상호 불신과 오해, 때로는 적대감까지 갖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가 교리적인 주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신학적인 견해를 주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교회 일치운동은 6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일치 노력과 70년대와 80년대 사회운동 현장에서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운동이 유례없이 왕성하던 60년대말에서 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는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신구약 공동번역 성서라는 성과를 거둔다. 이 역사적인 공동번역 성서 이후에 가톨릭과 개신교는 어려운 시대를 함께 헤쳐 오면서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다.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같은 목표로 현장에서 만난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존중하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복음적 소명으로 신앙을 함께 채워나갔다. 하지만 이런 만남들은 완전한 일치를 위한 바탕으로 축적되지는 못했다. 근본적인 교리상의 차이에 대해서 서로 언급하기를 꺼려했고 변변한 신학적 대화의 장도 마련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공동번역성서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민주화의 진전으로 현장에서의 만남도 줄었다. 1968년 시작된 일치기도모임도 신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90년대 접어들어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교회 일치에 대한 인지도와 참여도는 더욱 떨어졌고 일치운동을 이끌어가야 할 성직자들의 경우에도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무관심이 높아져 일치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여건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2000년 대희년을 기점으로 역사적인 반성이 이뤄지고 타종교와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와 대화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됐고 이에 공감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사회현장에서의 만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대화와 만남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하게 제기돼왔고 사회적인 이슈에 있어서도 이전의 인권과 민주화에 준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중심으로 연대가 이뤄질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환경 보호, 가정 및 생명운동, 도덕성 회복, 민족 화해, 빈부 격차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협력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들을 연대를 요하는 새로운 관심사와 공동의 목표로 제시되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했으며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각 종파들이 공식적인 차원에서 신학적, 교리적인 대화를 나눠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식적인 대화의 예를 이미 보편교회 차원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보편교회의 신학 대화
한국의 교회 일치 운동에서 신학적 대화와 모임은 그 성과와 경륜이 일천하지만 역대 교황들과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한 만남과 대화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꾸준하게 이어져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 및 프로테스탄트와의 신학대화를 본격화한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만나고 이듬해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한데 이어 1967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와 신학 대화를 시작한다. 1979년 11월 30일 신학 대화를 위한 로마 가톨릭-정교회 대화위원회가 양측 30명의 대표로 결성되고 1988년까지 다양한 보고서가 발표됐다.
개신교와의 대화는 1967년 복음과 교회를 주제로 한 신학대화에서 시작돼 1972년 「말타 보고서」가 발표됐고 1973년에 「루터교-가톨릭 합동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성체성사, 교회직무, 교회일치 등 교리 문제외에 사목문제도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성체성사, 주교직에 대한 보고서, 198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450주년과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공동선언문이 발표됐다. 1986년 구성된 「교회와 의화: 의화교리에서 본 교회 이해」를 논의해온 합동위원회는 마침내 1999년 10월 역사적인 「의화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을 발표한다.
성공회와의 대화는 1970년 「영국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위원회」에서 시작되는데 12년동안 성체성사, 교회직무, 교회 안의 권위에 대해 논의한 끝에 최종 보고서를 간행했다. 1982년 구성된 제2기 위원회는 1993년까지 구원과 교회, 친교와 교회라는 합의 선언문을 마쳤으나 영국 성공회의 여성 사제 승인이 새로운 장애로 나타났다. 교황청은 그외에도 개혁교회 세계연맹, 세계감리교협의회, 오순절교회, 침례교 등 개신교 각 교파들과도 대화위원회를 다양하게 구성해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며 그 성과를 각종 문헌으로 작성하고 있다.
풍성한 열매 맺길
일치운동이 보다 성숙하기 위해서 신학 대화가 본격화돼야 한다는 것이 최근 일치 운동의 추세로 보인다. 물론 교도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지역교회 차원에서의 대화는 있을 수 없다. 특히 한국교회의 신학 대화의 경륜이 일천한 점과 아직도 교파간의 몰이해와 오해, 적대감이 불식되지 않은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일단은 신학 대화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기본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서로의 교리적인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선포와 증언을 통한 일치의 노력은 가톨릭을 포함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일치 운동에 그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 주교회의 교회 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가 개신교, 성공회, 한국정교회 등과 공동으로 지난해 1월 21일 서강대 이냐시오관에서 개최한 합동기도회 장면.
◆ 그리스도교 제 종파 교리상 차이
동방교회.개신교 - 교황의 수위권.무류성 부정
성공회 - 교황의 교도권.통치권 부정, 7성사 인정
개신교 - ‘성서만이 계시의 원천’…성전은 불인정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주님, 같은 구세주를 믿는다는 점에서 모두가 한 형제이며 가족이지만 교리나 신앙 생활, 전례와 전통적 관습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차이들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개방과 수용의 자세를 바탕으로 보다 깊은 신학적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유이다.
동방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전례와 관습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성사와 교리 등 모든 면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교리와 실천 면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동방교회는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지만 통치권적 수위권은 배척하며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한다. 성모에 대한 신심은 두텁지만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교리는 거부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근본적인 교리상 차이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계시의 원천에 관한 것으로 가톨릭 교회는 성서와 함께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전통, 즉 성전을 계시의 원천으로 간주하지만 개신교는 성서만을 계시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개신교에서 교황의 수위권이나 무류성, 마리아 교리와 성사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구원론의 차이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이 따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개신교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된다고 가르친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세계연맹은 1999년 10월 31일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을 통해 구원론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리 논쟁이 종결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사후에 대한 교리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즉 가톨릭 교회는 천국과 연옥,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갖고 있지만 개신교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종말의 부활 교리만이 강조된다. 따라서 가톨릭의 전통 교리들인 성인들의 통공, 연옥에서 정화되는 영혼들에 대한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제사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영국 교회를 모체로 성립된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교회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황의 교도권과 통치권을 부정한다는 면에서는 개신교에 가깝지만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고수하고 성전과 7성사를 인정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와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