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아제한정책의 산물
1950∼1960년대 「베이비붐」으로 급격한 인구증가현상이 나타나자 정부는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는 형법(제269∼270조) 개정을 통해 인공유산에 따르는 처벌 조항을 폐지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를 비롯한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유신정권은 73년 1월 30일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모자보건법을 제정, 여론의 저항을 덜 받으면서 낙태의 길을 열어 놓았다. 모자보건법은 이처럼 제1조 목적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모성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 도모」라는 취지와는 달리 낙태를 합법화하기 위해 편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모자보건법은 한마디로 「산아제한」정책의 산물이다.
모자보건법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법의 출발에서 알 수 있듯 낙태를 통해 인구를 조절하겠다는 발상에 있다. 즉 어떤 의도이든 간에 인간의 생각으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치 않겠다는 반윤리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시초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법 조항의 문제점
모자보건법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제14조 1항이다. 이 1항은 ①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②전염성 질환 ③성폭행에 따른 임신 ④혈족간, 인척간 임신 ⑤모체의 건강을 크게 해하거나 해할 우려 등 5개의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또 2항과 3항은 배우자의 행방불명 등 부득이한 사유로 인해 동의를 구할 수 없거나 본인이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 제3자의 동의만으로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한 생명이 완전히 타인의 손에 좌우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나아가 이 규정은 낙태 남용의 위험성을 상당히 포괄하고 있다. 왜냐하면 법이 규정하고 있는 상황의 사실 여부를 일일이 조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증명하기도 힘들어 낙태를 원하는 사람이 쉽게 이 법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자보건법은 제12조에 정부 차원의 피임시술 및 피임약제의 보급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비롯, 피임시술자의 자격(제13조) 등의 조항을 통해 피임시술을 장려하고 낙태를 조장하고 있다. 특히 모자보건법은 낙태 사유를 확인하지 않거나 허위로 낙태시술을 행한 의사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어 사실상 낙태를 자유화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국내에서만 매년 150∼200만건에 이르는 낙태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모자보건법에 따른 합법적인 낙태조차 84년 7.3%, 88년 8%에 불과한 상황은 낙태의 90% 이상이 국가의 묵인 하에 이뤄짐으로써 낙태 천국이 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1998년 한해동안 검찰이 처리한 총 56건의 낙태죄 가운데 그나마 무약식기소는 3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기소처분해 낙태죄로 처벌받는 형사사범이 거의 없는 현실은 우리 시대의 생명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상황을 드러내주고 있다.
▲ 모자보건법은 국가와 법, 의료계, 나아가서 사회가 한 무리가 되어 낙태를 방조해온 「태아 살해의 온상」인 셈이다. 사진은 모자보건법 폐지 서명운동.
- 태아는 사람도 아닌가
모자보건법은 법규정에서 드러나듯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법에서도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그것도 살아서 태어나야 사람으로 인정받고 권리를 갖게 된다. 따라서 출생 전의 태아나 죽어서 출산된 경우는 사람으로서의 아무런 권한이 없다. 결국 태아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형법은 민법보다 조금 앞선 시점인 출산을 위한 진통이 시작되면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진통 전 태아에 대해서는 낙태미수나 태아상해, 과실낙태 등이 처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자보건법시행령은 한발 더 나아가 제15조에 낙태허용기간을 28주 이내로 규정해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의학은 20주만 지나도 모체 밖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발달돼 있다. 이런 현실에도 임신 7개월이 지나 생존능력을 갖춘 태아를 임의로 죽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대 법학과 김일수 교수는 『20주가 지나 조산된 아이라도 모체 밖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현대의학기술 수준에 비춰 볼 때 이런 조항은 인간의 생명보호요청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한 현재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등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는 낙태사유도 『산모의 생명과 건강, 태아의 생명과 건강이 충돌하는 경우로 국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위헌…폐지 마땅
이처럼 모자보건법은 국가와 법, 의료계, 나아가서 사회가 한 무리가 되어 낙태를 방조해온 「태아 살해의 온상」인 셈이다.
따라서 낙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적, 제도적으로 모자보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기본 시각이다. 특히 모자보건법상의 독소조항 중 핵심으로 꼽히는 낙태의 허용한계 조항은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는 게 교회의 입장이다.
배종대 고려대 교수(형법학)는 이와 관련해 『모자보건법은 「낙태자유화법」으로 이해해야 하며, 낙태자유화를 통한 인구증가의 억제가 이 법의 진정한 의도였다』며 『모자보건법의 낙태와 관련된 규정은 헌법 제10조 인간존엄 규정에 위반돼 위헌』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모자보건법은 단순히 이 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3자가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낙태를 하도록 하는 등 다수를 죽음의 문화로 이끎으로써 생명문화를 저해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또한 우생학적인 이유를 근거로 개연성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거나 미처 나타나지 않은 가능성만으로 태아를 살해하는 사회의 모습은 개인의 권리 침해에 무감하고 인권에 대한 의식이 낮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법은 사회 양심과 흐름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따라서 법의 존재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나 교육적 효과와 영향도 고려해야 된다.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오늘의 현실에 사회 모든 성원이 공동 책임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새 생명을 진심으로 사회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필요성이 절실하다.
■ 인터뷰/송열섭 신부(주교회의 사무총장)
“ 생명문화 재건은 새로운 복음선포”
▲ 송열섭 신부(주교회의 사무총장)
모자보건법 제정 30주년을 맞아 이 법의 폐지를 위해 교회 안팎의 여론을 모아 나가는데 앞장서고 있는 주교회의 사무총장 송열섭 신부는 단호한 말로 만연한 반생명적 문화에 맞서는 싸움에 나서주길 호소했다.
『모두가 생명의 길을 원하지만 죽음으로 향해 가는 길에 익숙해져 있어 자신이 딛고 선 죽음의 문화조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일상화되다시피 한 반생명적 문화 속에서 신자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이런 흐름에 젖어들어 가고 있는 현실, 이런 가운데 복음의 핵심이 생명임에도 일선사목에서조차 생명이 등한시되고 있다고 진단하는 송신부는 복음적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새로운 시각으로 미사를 비롯한 각종 교육에 접근함으로써 신자들의 일상에서 정체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편한 것에 익숙해져 가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익숙한 것을 보편적이며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에 신자들마저 휩쓸리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수고로움」을 자청하는 희생과 나눔의 문화가 희석되고 있는 모습 또한 송신부가 비판하는 반생명적 문화양식이다. 생명을 등한시하면 교회의 미래도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그는 신자들을 향한 새로운 선교를 제안한다. 「생명의 복음」이 우리 내부를 향해 새롭게 선포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 손으로 영성체를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낙태한 의사의 손에 돈을 건네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낙태는 예수님을 살해하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마더 데레사의 말을 강조하는 송신부는 교회가 펼쳐온 생명운동을 자신과 무관한 양 받아들이는 신자들의 모습을 꼬집었다. 「각자의 일에는 은퇴가 있지만 생명운동에는 은퇴란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생명의 복음은 사랑의 복음과 연결돼 있으며 둘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복음이 퇴조하면 사랑의 복음마저 옅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팽배한 이기주의 퇴폐주의 문화의 현주소를 생명문화의 퇴조에서 찾는 송신부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는 새로운 생명문화의 건설을 통해 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근래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생명문화 재건을 향한 흐름을 새로운 복음선포라고 강조하는 송신부는 그런 가운데서도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안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새로운 복음화에는 그에 맞는 열정과 방법,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송신부는 그간 교회의 노력이 교의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면 앞으로는 문화적 접근을 통해 공감대를 더욱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자신을 떠나지 않고서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길을 넓혀 나가기 위해서는 현대적 의미의 희생과 극기가 필요하다면서 모든 신자들이 생명의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전환을 강조했다.
『성령은 바람이십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불고 있는 바람에서 새로운 희망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