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것이 중요
우리들의 영성생활은 수많은 작은 선한 일들로 이뤄진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행위들도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의식을 지닌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의해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우리들은 조금씩 큰것도 소홀히 하게 될 수 있다. 예를들어 성당에 가는 것을 좋아하여 다른 일들은 소홀히 한다면 성당가는 즐거움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해야 할 일을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면 나중에는 신심도 없어진다. 또 일 때문에 성체 조배나 여러 다른 신심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기를 계속한다면 나중에는 일에 대한 흥미나 헌신적인 태도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일에만 너무 열중하여 자기 만족을 구하는 태도도 좋지 않다. 자기 만족의 추구는 제일 중요한 것을 중요시 않고, 또 활동에 있어서 하느님과 영혼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희생을 거부하는 것
이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불리운 데 대한 느낌을 갖고 겸손하고 진실한 묵상 생활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간접적으로라도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생활을 구하지 않고 어떤 일에 열중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남기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키려 하지도 않고 자존심을 희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점점 영적 태만에 빠지고 어떤 소죄에 집착하고 만다. 예를들면 허영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경향이기에 곧 깨닫게 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소죄에의 집착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바로 잡을 의지가 없게 되고, 여기에 경솔까지 보태지면서 작은 거짓말을 하게 될 수 있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 고통도 느끼지만 이런 영혼의 병을 지니고 있으면 거짓말을 예사로 하게되고 영적인 싸움도 중단해 버리고 만다.
성토마스에 의하면 이같은 영적 태만의 또 하나 원인은 사람을 비웃는 것이다. 비웃음은 상대를 상해하려는 고의의 조롱을 말한다. 위대한 사람의 작은 결점을 화제로 하여 대화 방법을 흉내낸다던가 하는 것들….
이런 결점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 기도로 이끄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기도하는 이의 행위를 지탱하는 것 또한 은총이다.
3) 이기주의
우리는 먼저 자신의 이기주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을 구하는가? 내 결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 등등.
이기주의를 없앨수록 우리들에게 있는 하느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될것이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항상 하느님 것을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관상으로의 이해
모든 그리스도교 저작자들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묵상 뒤에는 관상이 따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연결은 자동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으나 매우 자주 일어난다. 문제는 바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연결되는 과정의 표지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십자가의 성요한이 제시한 이론을 몇가지 소개하겠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저서 「갈멜의 산길」, 「어둔 밤」을 통해 기도생활 영성생활에서의 상황 변화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성인은 영혼을 관상으로 이끌기 위해 『정화를 위한 메마름은 가끔 우울증이나 영혼의 다른 상태를 이용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처럼 자연적인 요소들과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혼합될 경우는 매우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묵상에서 관상적 삶으로의 진입을 식별해내기는 쉽지 않다.
우선 두가지 부정적인 표지들과 하나의 긍정적인 표지들이 변화를 특징짓는다는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 것들과 창조된 것들에 대한 맛의 상실이다. 감각과 상실들로 묵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의 불가능성, 즉 의지와 지식의 특별한 행위들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긍정적인 표지는 영혼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깊은 주의로 특별한 숙고들 없이 내적인 평화 속에서 오직 홀로 하느님과 있음을 기뻐하는 사실에 있다.
이 표지는 외적으로 우울한 기간과 흡사한 그리고 자신이 쉽게 묘사하지 못하는 상태를 평가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어린 집중은 관상 첫 단계에서는 거의 알아챌 수 없다고 밝혔다. 묵상에의 몰입 불가능성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커다란 열망과 영성생활에 있어서 일상적인 열심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이 기간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묵상과 관상의 상반성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가 오랫동안 관상상태에 있다가 다시 그가 떠났던 묵상과 더 가까운 기도 형태로 돌아올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
기도생활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신비와의 더욱 더 깊은 개인적인 일치라는 성격을 신앙에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상은 신앙을 좀 더 단순한 방법으로 단련하는 반면 묵상은 묵상하는 이의 모든 상상적 지성적 정서적 수단들을 움직이는 노력을 말한다.
우리는 기도 때 이뤄지는 인간 활동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하나의 협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로 이끄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기도하는 이의 행위를 지탱하는 것 또한 은총이다. 묵상 안에서 이뤄지는 신앙의 신비에로의 영과 마음의 몰입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일상적인 준비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