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영하 20도의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1월 29일.
강원도 영서의 끝 인제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빙판길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40여분을 달려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다다랐다. 면소재지라고는 하지만 10분이면 마을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농촌마을이다. 강원도 오지 중 오지이고 오히려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더 띄는 이곳에 춘천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 「기린 가정간호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엊그제 내린 폭설로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 없어요. 걸어서는 엄두도 낼 수 없고』
가정간호의 집에 들어서자 이곳 책임자 조운자 수녀가 진료가방을 챙기고 있다. 폭설로 대부분의 마을이 고립돼 방문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사륜 지프차를 이용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눈이 오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오늘처럼 기온이 떨어지면 산골짜기에 사는 노인들이 불이나 제대로 때고 살지 염려된다며 조수녀는 걱정이다.
빙판이 된 골목길을 걸어 20여분. 신발을 어디에 벗어 놓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지럽혀진 집에 들어서자 방문에서 고작 2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탄이 쌓여있고 눅눅한 냄새가 집안 가득하다.
『전화자씨, 오늘은 혈압이 괜찮네요. 약 잘 먹고 기도하니까 이렇게 건강해질 수 있잖아요』
조수녀가 전씨의 혈압을 잰 뒤 몸을 일으켜 세워준다. 올해로 꼬박 7년째 집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전화자(53)씨는 당뇨와 고혈압, 심장병을 동시에 앓고 있다. 대형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원주나 서울로 나갈 엄두도 낼 수 없다. 80을 넘긴 고령의 남편은 대소변을 챙겨 주는 것도 벅차다. 마을 보건지소에서 처방해주는 혈압약이 전씨의 유일한 생명연장수단이다.
『이런 환자들이 주위에 너무 많아요. 변변히 치료도 못하고 집에서 앓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지요. 이분들에게는 무엇보다 영적인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되도록 자주 방문해 함께 성호도 긋고 기도도 바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집을 나서는 조수녀의 발걸음이 무겁다.
기린 가정간호의 집은 의료시설이 취약한 인제군 기린면 지역에 의료혜택을 제공, 산간 오지 주민과 독거 노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1998년 세워졌다. 춘천교구의 지원으로 기린본당 옛 사제관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으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조운자(아니시아)수녀가 상주하고 있다.
지난 98년 가정간호의 집이 들어설 때만해도 이곳에는 변변한 병의원 조차 없었다. 면에서 운영하는 보건지소가 있긴 하지만 간단한 처방과 진료에 그쳐 대부분 오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기린 가정간호의 집에서는 산간오지 환자들을 매주 3회 직접 방문해 간호활동을 하고 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는 인제 한방병원 의사의 협조로 무료 한방진료도 펼치고 있다.
30여년 가까이 병원사목과 호스피스에 종사해 온 베테랑 조수녀이지만 이곳 활동은 도시 대형병원에서 일했을 때와는 다르다.
꿩 밭이라고 불릴 만큼 깊은 산골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를 찾은 조수녀는 할머니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밭일을 한다고 손은 흙이 굳은 채 문드러져 있고 목욕을 언제 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차라리 돼지우리가 이보다 더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다 무너져내릴 듯한 오두막집. 이대로 살다 죽을거라고 고집을 피우는 할머니를 데려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혔다. 새 사람처럼 변한 할머니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가정간호의 집이 어떤 곳인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뇌경색으로 사경을 헤매던 윤종옥(77)씨에게 신부님을 모시고 가 급히 대세를 준 조수녀는 얼마 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윤씨를 노인회관에서 만났다. 윤씨는 노인회관에 모인 친구들에게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 건 다 수녀님들 덕분이라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가정간호의 집이 이처럼 헌신적인 간호와 영적 돌봄으로 지역 주민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자 대도시 대형병원과 뜻있는 의사들이 동참했다. 모 대학 한방병원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지난 해 여름 이곳을 찾아 200여명에 가까운 노인들을 진료했고, 면사무소는 독거 노인들을 위한 목욕실을 마련해 매주 한번 개방하고 있다. 가정간호의 집은 소외 지역민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의 길을 터는데 한 몫을 해냈다.
가정방문을 마친 조수녀가 현리노인회관을 찾았다. 노인회관에서 열린 무료한방진료 덕에 조수녀와 안면이 있는 노인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할머니는 요즘 건강이 어떠세요. 혈색이 좋으신 걸 보니 요즘 애인 생기셨나보네요?』
조수녀의 농담에 노인회관이 한바탕 웃음바다로 변한다.
『수녀님 오신 다음에 마을 분위기가 얼마나 좋아졌는데요. 만날 때마다 아픈 곳 없냐고 항상 신경 써 주시고 혈압도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재 주시니 어찌나 고마운지…』
할머니들이 노인회관을 나서는 조수녀의 손을 꼭 붙들며 인사를 한다.
『이곳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병보다 더 심한 병을 갖고 있습니다. 외로움으로 인한 병이죠. 아파도 아프다고 말 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큰 보람이에요』
현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가정간호의 집은 오늘도 가난하지만 소박한 우리 이웃들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로 거듭나고 있었다.
◆ 2월 11일은 세계 병자의 날
루르드 성모 기념일을 병자의 날로
교황,“병자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2월 11일은 제11차 세계 병자의 날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 위원장 피오렌조 안젤리니 추기경에게 보낸 1992년 5월 13일자 서한을 통해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날을 병자의 날로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교황은 『루르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봉헌하는 희망과 은총의 장소인 동시에 그 상징』이라면서 「병자의 구원」인 마리아의 도움과 병원과 의료인의 수호 성인인 천주의 성 요한, 성 가밀로 데 렐리스의 전구에 이날을 맡겼다.
2월 11일은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한 서한 「구원에 이르는 고통」을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교황은 1984년 2월 11일에 이 서한을 발표했고 이듬해에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를 신설했다.
교황은 서한에서 병자의 날을 제정하고 기념하는 목적은 ▲하느님 백성과 가톨릭의료기관이 병자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보장해 주고, 인간적.초월적 차원에서 고통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도와주며 ▲각 교구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수도단체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보건 사목에 투신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의 소중한 참여를 장려하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도덕적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교구 사제들과 수도사제들,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병자에 대한 신앙적 도움의 중요성을 잘 인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계 각 교회에서도 병자의 날을 연중 사목 계획의 지표로 삼아 병든 이들에게 최선의 보건사목을 펼치고자 노력한다. 건강의 증진과 보호, 회복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열망이므로 이 분야는 모든 사람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정치, 민간 단체들과 협력이 가능한 특별한 분야이다. 이날을 거행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병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섬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고 선포하는 복음의 새로움을 재발견하게 된다.
인간 생명의 수호자요 봉사자로 부름 받은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고통받는 이들을 도움으로써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병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눠야 한다. 이러한 반성과 나눔을 통해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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