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 비서직과 더불어 4개 대학 강의를 다닌 1961년 이후는 정말 바빴다. 교황청이나 외국에서 온 편지나 공문을 번역하는 일부터 각 대학을 다니며 「사회학」을 강의하러 다니는 데다 대구시내 중심가 2개 본당의 지성인 교리반까지 맡았기 때문이다.
주교좌 계산동본당과 삼덕본당의 지성인교리반을 맡아 매주 2회씩 교리를 가르치는 바쁜 일정 때문에 당시 광주 대신학교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응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1967년부터는 선목소신학교가 재개교하면서 내가 초대 교장직도 맡게 됐다. 이때는 매일신문사 직원, 파티마병원 의사 등 교구산하 기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지성인교리반도 맡아서 더욱 바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외교인에게 천주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주던 이때야말로 사제로서 가장 활기찬 시절이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보람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때 지성인교리반을 통해 기관장들을 비롯한 지역의 수많은 유력인사들을 입교시킨 사실은 내 평생 가장 보람된 일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런데 사제로서 가장 고생하고 마음 아팠던 것은 선목소신학교 교장시절이다. 당시 학교시설의 절반도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바라보노라면 너무 애처러웠다. 바람 드센 앞산 밑 허허벌판에 공사중인 콘크리트 건물에다 화장실은 덜렁 바같에 하나만 있어 당시 80명의 신학생들은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서 세수하는 것은 물론 먹을 것도 턱없이 부족했다. 교장인 나도 밤이면 너무 추워서 뜨거운 물을 넣은 양철통을 껴안고 자야할 정도였다. 선목출신 제자들을 만나면 지금도 참 반갑다. 그들중 안동교구장 권혁시주교가 얼마전 『아이고, 교장신부님 반갑습니다』며 인사할 때 무척 기뻤다.
이 당시 잊지 못할 일은 교구장이신 고 서정길대주교님께서 나에게 자동차를 사 주신 일이다. 주교님께서는 교구청에서나 선목소신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저녁식사 후에는 매일 밤 교리반에 나가느라 항상 바쁜 나에게 오스트리아산 오토바이를 한대 구입해주셨다.
얼마 후에는 주교님께서 「이신부는 기동력이 필요하다」시면서 오토바이를 중고 찝차로 바꾸어 주셨다. 이때는 자가용이 흔하지 않던 시기라 교구청에서도 당시 매일신문사 사장이시던 고 김영호신부님만 승용차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이때가 내 평생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런데 그 차가 완전고물이라 매일 정비공장을 들렀다. 소신학교 바로 앞 정비공장 「신신공업사」 사장님은 『신부님, 개근상을 받으셔야 되겠습니다』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겨울엔 검은 수단, 여름엔 하얀 수단을 입고 밤낮 없이 내 젊음을 모두 바쳤던 그 고물차에 대한 추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앞만보고 달리던 10년 세월이 지나고 1971년 7월(8월24일 주교서품) 부산교구 보좌주교로 발령받았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나는 항상 주교후보로 올라갔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지학순 주교, 두봉 주교, 정진석 대주교가 주교품을 받을 때마다 항상 주교후보로 추천됐었다는 것이다. 최종 결정시에 항상 「아직 너무 어리다」는 평판이 있었다는 소문과 함께. 그런데 내 직전 주교품을 받은 정주교가 임명되기 전 어느 날 서대주교님이 지나가는 말로 『이신부, 청주 갈지 몰라요. 준비해요』라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아무튼 내가 주교품을 받을 당시 부산교구는 큰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좌주교가 된지 채 1년도 못돼 1972년 3월 30일 교구장서리로 발령받았다. 75년 6월 28일 교구장이 될 때까지는 참으로 힘겨웠다.
교구장 공석기간이 너무 길어 하루빨리 교구장으로 착좌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75년 7월 17일 당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이 방한해서 직접 주례한 착좌식을 거쳐 부산교구 제2대 교구장직을 수행하게 됐다. 이때가 나의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의 해였다. 그래서 행사명도 「착좌식 및 은경축 축하식」이었다. 사실 나는 합동 금경축을 지내는 등 은경축과 금경축 모두 개별적으로 지내지는 못했다.
교구장 착좌후 첫 조치가 인사이동이었는데 교구장으로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사제인사다. 이때 3~4명의 사제들이 찾아와서 항의할 때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도 완전한 사제인사는 어렵다고 본다. 교구장은 인사이동시 사제들로부터 원망을 들을 각오를 해야한다. 특히 부산교구는 항상 사제가 부족했기에 인사발령 내기가 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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