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복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신부에 의해 창립된 전교가르멜수녀회는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선교 정신과 교회 정신이 조화를 이뤄 열매 맺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전교가르멜수녀회의 영성은 빨라우신부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성숙시킨 가르멜 영성의 「관상」에 뿌리를 두면서 동시에 그의 내적 생활에 중심이며 사도적 활동의 지속적 동기가 된 「교회」에 대한 독특한 신비적 체험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는 이 신비의 증거자로서 모든 이가 교회를 사랑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즉 이렇게 수녀회 영적 유산은 창립자 프란치스코 빨라우 신부가 전달한 데레사적 가르멜 유산과 함께 빨라우 신부의 은사적이고 교회적인 새로운 체험이 한데 어울려서 형성되었다.
그런 면에서 『거룩한 교회여, 당신은 내가 당신으로 인해 당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아십니다』는 빨라우신부의 고백은 창립 초기 때부터 지금까지 수녀회 전체가 지향하는 삶의 고백으로 전해지고 있다.
빨라우 신부가 수녀회를 창립한 배경에는 당시 스페인 혁명으로 인한 불안했던 시대상을 떼놓을 수 없다.
1811년 스페인 레리다의 아이또나 마을에서 태어난 빨라우신부는 17세에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고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 요셉의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생활을 하던 중 그는 가르멜 영성에 심취하면서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 예수의 성녀 데레사 영성, 십자가의 성 요한의 관상적 침묵으로 내적인 면을 채워갔다.
수련생활 중 수도원이 불태워져 고향에 돌아갔던 경험, 그리고 사제 수품후 혁명 때문에 10년여 동안 프랑스에 피난을 갔던 과정 속에서 빨라우 신부는 사도직 수행과 함께 은둔 생활을 병행했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빨라우 신부는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맡으면서 사회내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됐고 인간의 고귀함을 반종교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세태의 쇄신을 위해 「덕행학교」(교리교육 시범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덕행학교는 당시 문화 종교 정치 사회적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이로 인해 빨라우 신부는 결국 학교를 폐쇄 당하고 이비사 섬으로 추방되는 일을 겪는다. 수녀회 설립은 빨라우 신부가 이러한 과정을 겪은 후 6년간 감옥 생활을 하며 고독 속에 교회 신비를 묵상하던 시기에서 비롯된다.
여러 역사적 상황 안에서 가르멜 성소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또 가르멜 관상과 활동 모델인 예언자 엘리야의 삶을 선택, 깊은 고독 가운데 사도적 열정에 불타 영혼들의 구원과 박해받는 신부(新婦)인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빨라우 신부는 마침내 교회의 끊임없는 영적 교류 및 기도와 사목 활동을 목표로 정하고 1860년 「관상」과 「활동」 두가지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에 봉사하려는 전교가르멜수사회와 수녀회를 창설한다. 1907년 교황 비오 10세 인준을 받아 현재 30여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교가르멜수녀회는 로마 카살레토에 총본부를 두고 있으며 「교회적 성소에 대한 뚜렷한 자각」「형제적 친교」「기도: 하느님과 우정어린 사귐」「자아포기와 복음적 수덕」등을 카리스마 특징으로 내보이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