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안내자 마수에
다음날 어둠이 깔리는 저녁 무렵에 안내자를 만나 길을 떠났는데, 얼마쯤 가다가 갑자기 안내자가 『여기에 좀 볼일이 있으니 잠깐 들렸다 갑시다』라고 하면서 어떤 집안으로 앞장서 들어가, 하는 수없이 뒤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책상 위에 한 사람이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데 보니 제복을 입은 경찰(정치보위부원)이 아닌가! 나는 앞잡이한테 걸렸구나 직감하였다. 「38 정치보위부」의 끄나풀로서 월남하는 사람들을 안내해 준다고 속이고 돈을 갈취하는 가짜 안내자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나는 여러 번 들었던 터였다. 순식간에 대여섯 명의 젊은 정치보위부원들이 나를 둘러싸고 『뭐! 이남에 간다고?』 『무슨 간첩이냐?』 『무슨 사명을 띠고 월남하느냐』고 하여,『나는 간첩이 아니다』, 『이남에 가서 신학교에 가려고 한다』라고 간단히 말하고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온갖 욕설과 구타를 하고 나서,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하고 내일 보자!』하며 나를 유치장에 가두었다. 다음날 심문에 대비하여 생각하다가, 너무 피곤하여 그만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야! 일어나라, 가자!』 하는 고함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그 길로 나는 해주의 「38 정치보위부 유치장」에 감금되었는데, 그날이 3월 2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거기에서 풀려난 것이 5월 초였으니까 만 2개월의 감방살이가 시작된 셈이었다. 점심때쯤 지정된 감방에 수감되었는데, 갇혀 있던 10여명의 사람들이 나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 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나에게 귓속말로 『있다가 점심을 못 먹겠거든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뒤, 내 마음을 다잡노라 애를 썼다. 더럽고 이상한 냄새가 물씬 나는 국밥 같은 점심이 들어왔는데, 내가 먹지 않는 것을 지켜보던 그 사람이 건네자마자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런데 2~3일 뒤에는 그것이 그리도 맛이 있고 기다려졌다.
▲ 필자가 평양 숭인상업학교 재학시 다녔던 성 미카엘 성당(관후리 성당)전경. 이 성당은 평양 최초의 연와(벽돌)제 건물이었다.
“신학교 가려 월남” 강조
수감된 지 며칠 되던 날 밤중에 불려나갔는데, 나를 꿇어앉히고는 여러 가지를 캐물었다. 월남하는 동기에 대해서는 사제가 되려고 덕원 신학교에 갔는데 신학교가 폐쇄되어 하는 수없이 신학교가 있는 남한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인민 공화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왜 덕원 신학교를 폐쇄시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좀 빈정대는 투로 말하기도 하였다. 『해주에 와서 어디서 잤느냐?』는 물음에는, 내가 머물렀던 교우집이 봉변을 당할 것이 뻔하여, 『아는 사람도 없고 발각될까봐 밖에서 잤다』고 하였다. 취조관은 『이 추운 겨울에 밖에서 어떻게 잘 수 있어?』하며 내 얼굴을 발로 차고 무릎을 짓이기도 하면서 실토를 강요하였으나, 참고 버티면서 내가 굽히지 않으니까 결국 그대로 썼다. 그렇게 한번 조서를 꾸민 다음에는 네댓새 또는 열흘 동안 그냥 감방에 처박아두었는데, 온종일 벽을 향해 앉아 있어야만 하였다. 그 뒤에도 온갖 협박과 구타 속에 네댓 차례 심문을 더 받았다. 그들은 심문을 할 때마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밤중에 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밤이 되면 또 불려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곤 하였다. 저들은 비밀을 알아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다. 보위부원이 월남하다가 붙들려 들어온 것처럼 가장하여 감방에 들어와서는 이것저것 묻기도 하였고, 독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노동절을 성대하게 지내는데, 거기에서 지낸 5월 1일 노동절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두 달만에 처음으로 흰쌀밥을 주었다. 그것도 한 그릇 곡상 주는 것이 아닌가! 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뒤 『박정일!』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또 심문을 받는 줄 알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갔더니『너는 석방이다!』하였다. 여비로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았다. 밖에 나가니 모든 것이 어색하였다. 따뜻한 봄 날씨였다. 수염은 길었고 입고 온 외투는 화사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