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에 비전과 전략이라는 두 가지 자질을 중심으로 개혁자를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비전과 전략을 갖춘 개혁자를 A급 개혁자로, 이 유형은 이상적인 유형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 두가지 자질을 겸비한 개혁자를 찾기 쉽지 않다고 한다. 둘째 유형은 비전은 있으나 실제적인 전략이 없는 B급 개혁자이다. 꿈꾸는 개혁자로 개혁의 결과가 미흡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유형은 비전도 전략도 없는 유형으로 입만 가지고 있는 개혁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개혁 성패의 관점에서는 이들은 그래도 덜 위험한 존재라고 한다.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네번째 유형인데 이들은 실제적인 전략은 있으나 비전이 없는 D급 개혁자들이다. 이들은 머리가 지나치게 좋고, 계산이 빠르며 빠른 시간 안에 개혁의 비용과 수익을 나름대로 계산하고 공익보다는 사익을 우선하여 행동하는 유형이다. 과거 실패한 개혁은 이러한 유형의 개혁자들 때문이므로 새로운 정권하에서는 첫번째 두번째 그룹의 개혁자들이 있기를 기원하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오늘 복음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이야기로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오는데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하자 지붕으로 환자를 내려 보내 치유받은 내용이다.
지금까지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복음전도 활동은 평화로운 분위기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에 강한 매력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분께 모여 들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인 마르코 2장 1절부터는 당시 유다교의 권위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의 대립이 시작되고, 3장6절까지 「다섯편의 논쟁」은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의 점점 더 깊어가는 대립의 양상이 나타난다. 오늘 복음은 그 첫부분으로 사죄권을 놓고 벌어지는 율법학자와의 대립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림으로 적대적 의사를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예수님께 반감을 표시한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당시 율법학자들이 잘 쓰던 논법으로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하는 것과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가라』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가지 모두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죄의 용서는 율법학자의 말마따나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기적적 치유 역시 하느님의 전능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일어나 걸어가라』는 두번째 말씀을 이룸으로 당신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첫번째 말씀도 사실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였지만 유다교를 대표하는 율법학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사죄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먼저 닫혀진 마음, 굳은 마음 때문이리라.
율사들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당시의 논리로는 메시아나 인자조차 사죄를 선언할 수 없었고, 그들은 기껏해야 사람들이 다시는 범죄하지 않도록 선도할 임무만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반론은 충분한 이유를 가졌다. 그러나 이론과 논리는 실제적인 사실에 의해 재해석될 때만이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말씀의 선포와 기적을 가지고 자신들의 논리를 재해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논리로 살아있는 실재인 예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자신의 논리로 하느님과 이웃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 지 오늘의 우리가 반성할 주제이리라!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들라면 전략적 신앙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율사들이 예수님께 거부감을 가지게 된 동기는 하느님의 뜻이나 공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으리라! 예수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 모아지고, 그럼으로써 그동안 누렸던 종교적인 권위와 기득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욕구가 이들을 예수님과 대립의 각을 세우도록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마저 거부할 수 있는 인간 욕심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눈감아 버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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