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성명서(전문)
우리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바랍니다!
참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온 인류가 추구하여야 할 크나큰 과업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전쟁의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그 강도를 더해 가는 이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염려하시면서 전세계 모든 나라에 평화를 위한 노력을 촉구하시고 온 인류에게 평화의 실현을 위하여 기도하자고 호소하십니다. 평화는 결코 무력 균형이나 국제 협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군비 증강이 또 다른 군비 증강을 초래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지상의 평화」 110항 참조). 강대국들이 무기 산업에 쏟아 붓는 비용의 백분의 일만 들여도 전세계의 기근과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세계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국이 공언하는 이라크 공격의 도덕적 정당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공격은 또 다른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입니다. 교황님과 더불어, 미국과 중동의 형제 주교들과 함께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은 전쟁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명명백백히 단죄합니다. 역사적으로 더 많은 전쟁을 일으켜 왔고 핵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이 먼저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전쟁의 위기에 놓인 당사국들은 모든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 합니다. 국제연합(UN)을 비롯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가 전쟁을 방지하는 단호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 또한 개탄하며 반대합니다. 7천만 겨레의 생명을 담보로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위기로 몰고 가며 국제 관계를 첨예한 긴장으로 악화시키는 북한 당국의 위험한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갖 힘의 논리를 배격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지지합니다. 모든 사람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모든 국가가 더욱더 긴밀한 형제 관계를 이루고 「평화」라는 인류의 공동선을 향하여 공존 공생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폭력의 문화, 죽음의 문화를 척결하고 이 땅에 평화의 문화, 생명의 문화가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야 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평화의 임금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평화가 우리 민족 가운데에, 나아가 세계 공동체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평화의 모후이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의 전구를 간청합시다. 교황님께서는 특별히 세계 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과 더불어 온 누리의 평화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3년 2월 14일
◆ 전세계 가톨릭교회, 반대 한 목소리
“예방적 전쟁 논리 이해 안돼”
이라크 공격이 임박했다는 우려 속에서 전세계 교회는 예외 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소위 「예방적 전쟁(preventive wars)」을 반대하고 나섰다. 교황청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교회는 이라크 공격이 윤리적으로 부당하며 정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제법적인 면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쟁의 정당성 여부 외에도 이라크전이 발발할 경우 생겨날 수많은 희생자들과 난민들 문제, 12년 동안의 금수조치로 인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이라크 경제가 전쟁으로 완전히 붕괴할 경우 국민들의 생존 문제 등 복지와 인권 차원에서 예상되는 문제들 역시 심각하다.
우선 교황청은 「예방적 전쟁」의 논리는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공격 지지자들은 「정당한 전쟁」의 개념을 확대 해석한다. 오늘날 국제적 테러 행위가 정당한 전쟁의 개념을 변화시켰으며 대량 살상용 생화학 무기에 대해 예방적 차원에서의 공격은 자위권의 정당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교황청은 이를 명백하게 「침공(war of aggression)」으로 간주한다. 교황청은 스스로 「평화주의자」는 아니며 한 국가가 테러로부터 자신을 수호할 권리를 지님을 인정한다. 하지만 실현되지 않고 충분한 증거도 없으며 국제법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은 이라크 공격 시도에 대해서는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강경한 비난의 자세를 견지한다.
미국 교회 역시 이라크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주교회의는 지난해 11월 13일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성명을 발표해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성명에서 주교단은 이라크 공격이 『 교회 가르침 안에서 엄격하게 요구되는 군사력 사용을 위한 전제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주교단의 전쟁 반대 성명은 이후 미국 내 각 교구장 주교들의 성명서에서 인용되면서 미국 교회의 원칙적인 입장을 구성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교회들도 주교회의 차원의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 성명을 냈고 아시아에서도 파키스탄, 인도, 일본 등이 주교회의 이름으로 평화를 촉구했다.
한편 미국이 전쟁을 강행하려는 이면의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이 이뤄졌다.
예수회는 미국의 전쟁 기도가 안정적인 에너지원, 즉 이라크의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권 확보에 있다고 분석했다. 예수회가 발행하는 「라 치빌리타 카톨리카」는 1월 18일자 사설을 통해 미국의 에너지 수요가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이라크의 석유를 확보하려는 것이 「이라크전의 숨은 동기」라고 지적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라크 바그다드 교구 보좌주교인 쉬레몬 와르두니 주교도 지난 1월 10일 이라크의 막대한 석유 생산이 이라크 공격의 실제 이유라고 주장했다.
미국 국적의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의장인 프란시스 스태포드 추기경은 2월 3일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석유 보유량과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문제들까지도 『솔직하고 개방적이며 종합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오사카교구 보좌주교 고로 마츠우라 주교가 2월 3일 발표한 성명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군들이 이미 이라크의 생화학무기에 대항할 백신 접종을 마쳤다며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유엔 사찰단의 2차 사찰 보고서 결과에 상관없이 이뤄질 『계획된 침공(planned invasion)』이라고 규정했다.
▨이라크 공격은 더 많은 증오를 야기하고 극단주의자들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캐나다 주교회의 성명서, 1월 23일).
▨테러리즘에 대한 싸움은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전쟁을 통해서 이뤄져서는 안된다. 전쟁이 아니라 불의와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을 통해 분쟁이 해결될 것이다(남아프리카공화국 주교회의 성명서, 1월 31일).
▨예방적 전쟁은 불의한 것이다. 전쟁은 침공에 대한 방위일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이탈리아 주교회의 사무총장 주세페 베토리, 1월 28일).
▨이라크전은 대량 학살 등 인륜에 어긋나는 심각한 범죄를 피하기 위한 것일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독일 주교회의 성명서, 1월 20일).
▨전쟁은 오히려 앞으로 테러를 더 양산할 것이다(아일랜드 가톨릭교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쟁을 할 이유가 없다. 이라크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류의 불명예이다(멕시코 시티교구 노베르토 리베라 카레라 추기경).
▨현재 상황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충족하지 못한다(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주교단 공동성명, 1월 중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모든 대체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파키스탄 라호르 대교구장 로렌스 살다나 대주교,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이라크 공격을 지원해서는 안된다. 유엔과 부시 대통령은 유엔 사찰단이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한다(필리핀 주교회의 성명서, 1월 28일).
▨이 예방적 전쟁은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이며 이라크 시민들에 대한 재난이 될 것이다(국제 까리따스, 1월 21일).
▲ 2월 14일 33개 천주교 단체가 개최한 「이라크 전쟁 반대 및 한반도 평화위협 규탄 시위」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펴치고 있다.
▲ 파키스탄 물탄교구의 전쟁반대 시위에 한 여성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는 내용의 피킷을 들고 참가하고 있다.
◆ 전쟁에 대한 교회 가르침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쟁 이론 폐지 주장
비폭력 희생으로 폭력의 악순환 끊어야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폭력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지만 역사 안에서 교회는 정당한 전쟁 이론을 전통적으로 신중하고 제한적으로나마 견지해왔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전쟁 이론은 전쟁이 정당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한 것인데 정당한 이유, 전쟁 결정의 합법적 권위, 비례 정의, 정당한 목적, 최후의 수단, 승리 가능성, 균형성 등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전쟁의 개념이 크게 바뀌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의 전쟁을 죄라고 선언하고 정당한 전쟁 이론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현대 윤리신학에서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이어졌다.
현대 가톨릭 신학은 이제 대체로 정당한 전쟁의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추세이다. 걸프전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는 전쟁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인 경우는 무력적 침략에 대항하는 순수한 의미의 방어이기에 실제로 정당한 전쟁이란 없고 전쟁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쟁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먼저 진정한 평화가 군사적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원인의 제거와 화해에서 오는 것이기에 전쟁은 국가간의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어떤 종류의 부정에 대한 방위도 정당한 전쟁 이유가 될 수 없지만 중대한 부정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수단을 사용한 뒤 이를 저지할 수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방위권은 정당한 전쟁 이유가 될 수 있다.
현대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은 정당방위의 한계를 넘어서 대량 살상을 초래하므로 부도덕한 것이다. 따라서 핵이나 생화학무기 사용은 비윤리적이다. 아울러 군비 경쟁은 인류에게 엄청난 위협이므로 피해야 하며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 전쟁이므로 근본적으로 전쟁은 피해야 한다.
결국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폭력의 악순환을 비폭력적인 희생과 삶으로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