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들에게 결혼소식을 알리려니 참 부끄럽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그것도 아들 뻘 되는 다른 부부들과 함께 결혼서약을 하자니 얼굴이 절로 달아오르네요』
경기도 군포에서 일하는 베트남 근로자 자이(요셉.47)씨는 결혼소식을 아들에게 전하기가 쑥스럽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자이씨의 새 아내는 서울 답십리에서 일하는 두홍(마리아.45)씨. 두홍씨는 병으로 아내를 잃은 자이씨의 사연에 자연스레 호감이 갔고 결국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나이가 많고 한국말도 서툴러 결혼식은 생각도 못하던 차에 마련된 기회. 자이씨는 이 자리에서 세례까지 받게 돼 신혼부부의 기쁨은 더욱 컸다.
이들 부부 너머로 멀리 부산에서 온 반 비에트(베드로.27), 다이 쿡(마르타.27) 부부가 앉아 미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부산 베트남 공동체에서 만났다. 성당에 함께 다니며 만나는 시간이 잦아졌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결혼식을 할 성당을 찾기도 결혼식 비용을 감당하기도 너무나 힘들었다. 각각 가방수선공장과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형편에 결혼식장에서 결혼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꿨다. 혼배 미사가 있다는 소식에 둘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근사한 예복을 차려입고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갖게 됐다.
옆에 앉아 있는 나머지 다섯 쌍의 부부들도 마찬가지. 힘든 이국 생활에서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줄 동반자를 찾았지만 결혼식을 치른다는 건 이들의 입장에서 사치(?)였다. 그래서인지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새 신랑.신부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감격에 차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마련한 베트남 근로자 일곱 쌍의 혼배미사가 2월 23일 오후 2시 서울 보문동 노동사목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베트남 근로자 일곱 쌍이 한꺼번에 결혼식을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 형편상 결혼을 미뤄왔던 이들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도요안 신부의 배려로 이날 식을 올렸다. 도신부는 지난 1월 26일 일곱 쌍의 부부를 차례로 만나 혼인상담을 하고 직접 혼인 서류를 준비해주는 등 이번 혼배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혼배 소식을 듣고 대만에서 온 베트남인 피터 흥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베트남어 미사를 집전해 이날 결혼식은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됐다.
미사에는 경기도 안산과 광주,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의 베트남 근로자 200여명이 참석, 신혼부부들을 축복하고 이국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눴다.
『베트남 신부님이 한분도 안 계신 형편인데도 이렇게 결혼식을 마련해 주신 신부님, 봉사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만 가족들이 함께 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여기 200명이 넘는 동료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해주고 축하해 주지만 막상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씁쓸하네요』
결혼식을 마친 한 신랑의 말에서 머나먼 이국 땅에서 결혼식을 하는 이들의 가슴에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했다는 기쁨이,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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