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신자가 아니시고 공소도 없는 곳에서 자란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을 쓰신 다른 분들처럼 신학교에 가는데 주위 사람들의 축복과 권유, 기도의 뒷받침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도리어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신학교 입학이 늦어졌다. 다만 삼촌께서 사제가 되면 좋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지금 확실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말씀을 귀담아 들은 것 같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어느 여름날 저녁 동갑내기 사촌 누나(지금은 수녀)와 마당에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에게 신학교 가기를 권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사제가 되면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어쩌면 유학도 갈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때에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는 않았었다.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중학교 4학년 때였다고 기억한다. 마침 그 때 평양교구는, 공산치하에서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주교가 되신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님이 탄생하심으로써 매우 활기에 넘쳐 있었으며, 평양 관후리에 주교좌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으며 대대적인 성소계발에 힘을 기울였다. 본당 신부님들은 학생회를 활성화시켰으며 좀 열심한 학생을 보면 신학교에 가라고 권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 때 나는 학교 동기인 백민관 테오도로 신부와 함께 어떤 본당 신부님 댁을 자주 드나들면서 사제가 될 것을 서로 다짐하기도 했다. 사제의 길을 택하는데 그 신부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 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만물박사같이 보였다. 다른 모든 신부님들도 그럴 수 없이 우러러보였고 꼭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그 때였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3월 우리는 졸업예정이었지만, 한 학기를 단축하여 1944년 12월에 졸업하였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신학교에 갈 의향을 부모님께 말씀 드렸으나 반대하셨다. 그래서 좀 시간을 두고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고향으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기로 하였다. 내가 졸업한 시골 초등학교의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1945년 4월이었다.
라틴어 공부 시작
나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신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학교에 가려면 라틴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지금은 라틴어를 배우기 위한 책도 있고 사전도 있지만 그 때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어렵게 홍콩에서 나온 중국말로 된 라틴어 교본을 구하여 틈틈이 독학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를 모르면서 어려운 라틴어를 독학한다는 것이 말뿐이지 거의 진척이 없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여러 차례 신학교에 가겠다는 나의 의향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청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막무가내였다. 성당에나 열심히 다니면 되지 왜 꼭 신부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몰래 가출…점점 쇠약
약 3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계속 부모님과의 냉전 가운데서도 사제 되겠다는 나의 마음은 더 굳어져 가기만 했다. 1948년 봄에, 아직 부모님께서 허락 하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교사직 사표를 내고 9월(신학기가 9월이었음)에 신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로 하였다. 그 시기에 특히 신학교에 가는 문제 때문에 부모님과의 논쟁이 뜨겁기도 하고 잦았었다. 본당 신부님과의 면담과 라틴어 공부를 위해 몰래 가출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위장병에 걸려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아마 그 때에 하지 않던 육체노동을 갑자기 많이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몸이 쇠약해 진 것을 본 어머니는 『네가 신학교를 못 가게 하니까 병이 났구나』 하시며 마침내 굴복(!) 하고 허락을 하셨다. 그리하여 9월 초에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경영하는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해에 평양 교구에서 신학생이 여러명 입학하였는데 나와 같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라틴과(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라틴어를 전공하는 반)에 편입한 학생이 셋이었고 소신학생이 9명이었다. 나와 함께 라틴과에 편입하였던 두 학생은 6.25 때에 월남하지 못하여 지금 소식이 묘연한 상태이고, 소신학생으로 입학하였던 9명중에서는 유일하게 김득권 굴리엘모 신부가 월남하여 사제가 되어 지금 서울교구에서 열심히 사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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