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의 함성소리가 드높았다. 운동장을 누비는 거칠 게 없는 듯한 소년들의 몸짓 하나하나에선 첫봄을 기다리다 이들의 요동에 먼저 눈을 뜨고 있는 대지의 흙내음과 함께 싱그러움이 넘쳐 났다.
「정규형 대안학교」라 불리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 자리한 청주 양업고등학교(교장=윤병훈 신부)의 새 학기는 그렇게 문을 열고 있었다.
3월 21일, 「고참 문제아」들이 올해 처음 양업고등학교의 문을 두드린 「새내기 문제아」들을 위해 마련한 친교체육대회 자리에는 지시를 하는 교사도, 눈치를 봐야하는 어른도 없었다. 그저 한데 뭉쳐 정신없이 뛰노는 아이들의 아이다운 패기만 눈에 들어왔다.
교과를 담당하던 신부와 수녀, 그리고 교사들도 이날만큼은 학생회(회장=홍성준)의 지도(?)에 따라 학생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덩치 큰 학생들 속에 파묻힌 어른들은 언뜻 구분도 가지 않는다. 여느 운동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양업고의 운동회에서는 남모를 희망이 깨어나고 있음이 보였다.
이른바 문제아들만 모인다는 양업고, 그러나 문제아들 속에 낀 문제아는 더 이상 문제아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만난 「문제아」들은 평범한 꿈을 키우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자아」이자 학생일 뿐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진원지가 바로 어른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조그만 행사지만 선배 재학생들이 후배들을 위해 마련한 이날 운동회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소중한 마음들이 읽혔다. 학생회가 주축이 돼 축구와 이어달리기 등으로 꾸민 행사 내내 2, 3학년 선배들이 몸소 새내기들에게 보여준 것은 「꿈을 지니게 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싫고 귀찮기만 했습니다. 희망이란 건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죠』
잠시 쉬는 틈을 타 운동장 한켠에서 만난 3학년생 정호균(바오로.21.분당 성 마태오본당)군은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양업고를 찾게 됐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새로운 꿈을 지니게 된 현재가 스스로도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공예학과에 진학해 기발한 종이공예로 벤처기업을 일궈내고 싶다는 정군은 자신이 생각해도 많이 변했다고 웃음짓는다.
『선생님이 아빠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형같기도 합니다』
자신의 변화를 형같이 친근한 선생님에게서 찾는 정군의 이런 마음은 그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중학교 때 건강문제로 학교를 쉬다 적응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쳐야 했던 오혜진(3년)양은 일반학교에 합격하고도 양업고를 선택한 경우다. 지금은 학생회의 여자생활부장으로 열심히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오양은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 「초콜릿 아티스트」가 되는 게 꿈이다.
『이런 꿈을 가질 수 있게 될 지 예전엔 정말 상상도 못했죠. 이 학교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학생들에게서는 교사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전해져왔다.
양업고가 이렇게 부적응 학생들의 새로운 꿈을 일궈내는 터전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땀과 노고가 숨겨져 있다. 지난 98년 우리나라 최초의 특성화 고등학교로 문을 열어 2001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가장 노심초사했던 이는 교장 윤병훈 신부다. 윤신부가 학교를 이끄는데 있어 주안을 두고 있는 점은 스스로 자유를 향유할 줄 아는 학생을 육성하는 것이다.
『자유는 숨겨진 능력을 발휘시키고 내면의 창조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힘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려보지도 누릴 힘도 지니지 못한 학생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했던 것이 자유가 지닌 힘이었다. 매년 전국으로부터 몰려드는 300여명의 지원자들 가운데서 40명을 뽑는 신입생들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키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자유를 방종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 1학년은 불안감이 어느 학년보다 크다. 이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이는 사제도 교사도 아니라 바로 같은 아픔을 경험했던 선배와 동료들이다. 학교를 뛰쳐나간 친구를 설득하러 부산, 인천 등 먼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 함께 하려는 노력이 어느새 양업고에서는 전통이 되고 있다.
양업고에는 종교교육시간이 따로 없다.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도자가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이들도 특별히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삶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스레 예수를 배우고 닮아가는 곳이 이곳이다.
학생들이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눈을 떠가고 있는 교실에는 「기쁨」「평화」「인내」「사랑」「온유」「진실」「친절」「절제」「믿음」「소망」이라는 이름들이 붙어있다. 바로 학생들이 자연스레 배워나가고 있는 덕목들인 셈이다.
이런 삶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해 양업고는 「알코올」을 비롯해 「폭력예방」「금연」 등 다양한 특성화 교과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 교과마저 학생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하고 있다.
매년 여름 2박3일 동안 진행되는 지리산 산악등반을 비롯해 봉사활동은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간의 마음을 열어주는 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속에서 학생들은 열린 마음을 지니게 되고 공동체를 이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기숙사 생활 수칙과 규율을 만들어가는 이도 다름 아닌 바로 학생들 자신이었다. 매일 밤이면 꽉꽉 들어차는 도서관의 모습도 누구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런 자율의 힘일까. 3년을 마치며 졸업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의 원하는 곳으로 진학하는 등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매년 일어나고 있다.
『교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변화시켜 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제자들이었다는 깨달음은 저희들로서도 값진 수확이고 선물입니다』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는 최규준(35) 교사는 부적응 학생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놀랄 정도로 변하는 모습 속에서 자신도 함께 변해가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함께 성숙해가는 과정에는 부모들도 예외가 없다. 자식들의 입학과 함께 성격 유형검사(MBTI)를 함께 받은 부모들은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열리는 학부모회의에도 70% 이상이 참여하는 등 열성적이다.
「부모역할훈련(PET 교육)」도 양업고가 마련하고 있는 가족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영업고가 가장 첫손에 꼽는 것이 바로 인내하면서 믿고 기다려주는 자세다.
『선배들의 당당한 모습을 배우고 싶습니다. 3년이 지나면 저도 참다운 자유와 자율에 눈을 뜰 수 있겠죠?』
올해 입학한 전혜지(17)양의 선배를 향한 물음이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양업고는 그렇게 꿈이 없던 이들도 함께 꿈꾸는 법을 배우고 꿈을 갖게 되는 터전으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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