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급속한 변화와 변혁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과거의 틀을 깨고 새로운 인식과 관행, 질서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고 논란이 일면서 우리 사회는 일견 혼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종교 역시 이러한 변화의 바람에서 예외일 수 없다. 창간 76주년을 맞아 오랫동안 종교.문화 현상을 연구해온 원로 종교학자인 정진홍 교수(서울대 명예 교수)로부터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과 한국 종교 및 종교인들의 과제, 그리고 특별히 교회밖 제삼자로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전대섭 취재부장(이하 전) : 최근 우리 사회는 계층간 갈등과 반목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진보」 와 「보수」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진홍 교수(이하 정) : 위-아래, 지배자-피지배자, 세대간, 남녀간 등등 계층간 갈등을 묘사하는 언어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세계와 역사, 문화, 사람을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갈등 구조입니다. 보수는 변화보다 본질적인 것이라고 이해된 것의 유지를, 진보는 그런 본질적인 것이 실은 변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두 태도가 상황적 선택이지 절대적 전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보수나 진보나 근본주의적일 때 생깁니다. 근본주의화한 보수, 또는 근본주의화한 진보는 위험합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입니다. 비판에 열려 있고 비판을 수용해야 합니다.
보수-진보는 상황적 선택
전 : 지난 대선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는 급속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정 : 변화와 개혁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탈권위주의의 권위주의」, 또는 「서열파괴가 초래하는 또 다른 서열」 등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문제는 변화를 이끈다는 자의식을 지닌 주체들, 그리고 변화의 필연성을 요청하는 주체들이 가지는 「힘」도 「권력」이고 그 권력 또한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권력의 속성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아울러 변화의 계기마다 등장하는 「수사(rhetoric)」들의 문제입니다. 변화를 상징하는 구호들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개혁」에 매료돼 정작 개혁의 「내용」은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합니다.
변화의 「수사」보다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스스로 비판적인 계획들이 나와야 합니다. 물론 개혁이 삶 구석구석에서 실천될 때 전체의 숨통을 틔우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 :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주의화되고 그 기능과 역할도 축소됐다고 말합니다.
정 :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에 종교가 지녔던 절대적인 가치가 상실되고 세속적인 다른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도화된 기존 종교의 모습으로만 종교를 운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그러한 종교의 전통적 기능과 가치는 지속될 것이지만 이른바 대체종교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종교적」 현상들이 기존 종교의 영역을 「침식」하거나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아질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오늘날 종교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돼 있습니다.
한편으로 종교인들은 과연 종교의 가르침대로 잘 살아왔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기복적」 신앙,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필요할 때 신을 불러내는 「신의 도구화」가 기성 종교들 안에 흘러넘칩니다. 저는 거대 공동체의 이념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종교의 가치가 전승되고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노드 등 성찰 노력 보여
전 : 그러면 오늘 한국 사회에서 종교, 종교인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입니까.
정 : 종교가 사회를 자기 규범으로 「지배(control)」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정치, 경제, 과학기술, 문화 등 제반 영역과 요소들간의 갈등에 있어서 종교가 포괄적으로 「위에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즉 「지배하는 기능(dominating function)」이 아니라 「매개하는 기능(mediating function)」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이 세상의 중재자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전 : 최근들어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 가톨릭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정 : 상대적으로 가톨릭에 대해서는 「건강하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단단한 틀을 지니고 이익집단적인 속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가톨릭의 행위 양태를 보면 교회의 대사회적 주장이 가톨릭이라는 집단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일관성 있게 지속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싶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정치적」인가 하면 때로는 그만큼 「종교적」이기도 합니다. 그 양자 사이의 줄타기가 기교적으로 인상 지워질 때도 있습니다.
미국 가톨릭에서 부각된 바 있는 성직자 성추행 문제와 관련해서는 성직자의 정체성을 포함한 깊은 신학적 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을 포함해 성직자의 성추문에 대한 공식 자료는 없지만 예컨대 많은 학교의 상담 사례들을 통해서 이런 사례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성직자의 독신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상대적으로 가장 건강하고 자체 안에서 상당한 자의식에 근거한 성찰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시노드가 그 한 예일 것입니다.
전 :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가톨릭 교회의 최대 관심이고 모든 종교의 공통된 화두입니다. 최근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에서도 보듯이 우리 사회의 생명 의식 수준은 아직 유아적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 : 모든 것이 물화(物化)될 수 있다는 현대 문화의 질병이 낳은 결과입니다. 종교가 그런 경향을 막으리라 기대할 수 있지만 종교 조차 「생존」을 위해서 물질 의존적이게 된 것이 현대의 정황입니다. 따라서 종교도 스스로 이 참사의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물화 현상 자체를 제대로 서술, 이식, 해석해 새로운 윤리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상실의 아쉬움과 아픔」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대와 꿈」을 발언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과 인간 존엄의 문제에서도 고발에 못지 않게 꿈을 시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새롭게 신비를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토착화는 새 종교 만들기
전 : 그리스도교가 진정으로 아시아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토착화」의 과제가 중요합니다. 토착화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정 : 「토착화」라는 용어보다는 「문화접변」이라는 용어를 저는 즐깁니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면 반드시 변화가 초래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변화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한국 가톨릭의 역사가 200여년인데, 그렇다고 그 이전의 역사가 암흑의 시대는 아닙니다. 5천년 역사라고 할 때 나머지 4800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그 나머지 기간에 이 땅에서 어떤 역사를 했는지를 대답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토착화에 대해 「갓 쓴 예수」 같은 문화적 표상에 집착하는데 관건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또는 우리의 물음을 정직하게 묻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반향을 경험하고 경청하며 그로부터 비롯하는 해답의 적합성을 물음 자리에서 현실화해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자발적인 수용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전통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고 그 응답을 복음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 문화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타자(experienced other)」로 인식하고 서양 문명은 경험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아(unexperienced self)」로 여깁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이 토착화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토착화는 결국 그 종교가 지닌 해답이 현실적으로 적합성을 지닌 것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데로부터 이뤄지는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새 종교 만들기」라고 생각합니다.
전 :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진홍 교수는<.strong>
종교현상을 학문대상으로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국내 1세대 종교학자 정진홍(鄭鎭弘.65) 전 서울대 교수는 신앙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던 종교를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 종교에 대한 공적 담론을 이끌어낸 대표적 학자로 꼽힌다.
충남 공주 출생이며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조교수와 명지대 부교수를 거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난 2월 정년 퇴임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저서로는 「종교학 서설」 「삶의 벼랑에서」 「종교문화의 인식과 해석」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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