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신학생시절, 당시 평양교구장이던 홍용호 주교.
그 때의 신학교 학제는 중등과(소신학생) 5년, 고등과(라틴과) 2년,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으로 짜여져 있었다. 나는 라틴과에 편입이 되었지만, 워낙 기초가 없었기 때문에 중등과 5년 동안 라틴어를 공부한 같은 반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수가 없어서 혼자서 자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신학생들은 주일마다 수도원 성당에서 당시 수도원장이시며 원산교구장이셨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님(독일인?성 베네딕토 수도회원)의 장엄 미사에 참례하곤 하였는데 가장 인상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때에 알게 되었고 함께 지냈던 신부님들과 선배, 동료 신학생들 가운데 월남을 하지 못한 분들, 월남은 하였지만 이미 고인이 된 분들에 대한 생각이 이 순간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또한 신학교가 있던 덕원에서 원산이 가까웠기 때문에 외출이 허락되는 날 원산의 명사십리를 거닐어 본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서포 본원.
무거운 발길로 평양에 도착한 우리는 홍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했으나, 주교님께서는 바로 그날 납치되시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주교님께서는 그날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서포(서포읍은 평양에서 약 20리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본원에 가셔서 종신 서원자들을 면담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납치되신 것이었다. 그 때 우리 신학생들의 암담한 심정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공산정권의 종교 탄압이 점점 더 심해짐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앞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신학생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월남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38선이 막힌 1945년부터 많은 북한 사람들이 월남하였으나 38선의 경계가 더욱 심해져서 1949년은 월남이 쉽지 않은 때였다. 그래도 그 해에 몇몇 신학생들이 월남에 성공하였는데, 윤공희 대주교님과 지학순 주교님도 그 분들 가운데에 속한다. 나는 고향이 시골이고 38선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에 대한 소식을 잘 알 수 없어서 답답하였다. 그러나 무작정 기다릴 수만 없어서 월남하는 길을 나름대로 알아보고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나의 월남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에 부모님과는 상의없이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사촌 누나(현재 한국 순교복자회 박요셉 수녀)하고만 의기투합하여 의논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행히 평양의 어떤 열심한 신자의 소개로 해주에 사는 신자를 통하여 38선 안내자를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여행이 자유롭지 않고 조사가 심한 북한 땅에서 젊은이가 38선 가까이 있는 해주시까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었다. 더구나 내가 월남을 단행하기로 한 때가 1950년 2월이었으니 6.25가 터지기 겨우 4개월 전인지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었다. 나는 6.25가 터지리라는 것은 알 턱도 없고 오로지 월남하여 신학교에 간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러한 무모한 일을 부모님과 의논도 없이 독단으로 추진하였고, 더구나 다음번에 이야기가 되겠지만, 내가 월남에 실패, 38선에서 체포되어 38 정치보위부 유치장에 있는 동안(2개월) 부모님과 온 가족에게 심려를 끼치고 두려운 나날들을 보내게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미안한 감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