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평화를 염원하는 거대한 움직임들이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과 위안을 느낍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전세계 군종 사제들에게 보낸 메시지, 3월 25일).
폭격으로 발목이 덜렁거리는 딸, 그 딸을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큼직한 나무관에 피투성이가 된 아내와 자식들을 담아둔 사내의 넋 빠진 얼굴, 온몸에 붕대를 감고 허름한 야전 침대 위에 널부러진 소녀….
어떤 미사여구와 명분으로 포장을 한다 해도 무죄한 사람들이 겪는 처참한 고통 하나만으로 전쟁은 반대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황의 말마따나 인류의 양심은 결국 「전쟁 반대」를 외칠 수밖에 없다.
이라크전이 벌어지기 한달 쯤 전, 전세계에서는 절정에 이른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뉴욕에서부터 베를린, 텔아비브, 서울, 도쿄에 이르기까지, 100개국 400개 도시에서 1천여만명의 시민들이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고 나섰다.
3월 20일 새벽을 가르며 미사일이 바그다드를 향해 날았고 침공은 시작됐다.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장기전 양상을 보이고 희생자가 늘어났다. 이후 반전 운동과 시위는 지구촌 곳곳에서 한순간도 끊김없이 이어졌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전장의 참상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오히려 테러 같은 전장을 생중계함으로써 반전 구호는 더 큰 반향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인간 방패들이 이라크와 인근 나라들로 목숨을 담보로 한 평화 시위를 위해 떠났다.
반전은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의 비참을 체험했고 유일하게 냉전이 남은 한반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전은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파병 문제까지 겹쳐 있다. 결국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시민사회단체들은 위헌소송에 「반전평화를 위한 비상국민회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반전 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제 반전은 일부 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식인들과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에 가수, 탤런트, 개그맨 등 연예인들의 모습도 집회에서 보인다. 인터넷에서도 반전 여론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메신저 대화명 앞에 「NO WAR」, 「반전」 등의 구호를 붙이거나 비둘기 모양과 파란리본 달기가 한창이다.
생활 속의 반전 운동도 뜨겁다. 반전 배지 달기도 확산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과격한 시위나 집회보다는 반전 스티커 붙이기, 강연회나 콘서트도 마련됐다. 극소수 대학생이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진 것이 유일한 반전시위였던 걸프전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참된 평화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사목헌장 75항). 하지만 총부리 앞에 무방비로 선 사람들에게 「전쟁 없는 상태」는 평화의 최소 조건일 수밖에 없다. 세계는 지금 이라크에서 첨단 무기보다는 모래바람 속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은 목숨 하나 건지려고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속에서 사막을 헤매는 난민들을 본다.
전세계 반전 세력의 선봉이라 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동시 다발로 벌어진 1천만명의 『전쟁 반대』 목소리도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중지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정의와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노력조차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19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역사는 되풀이된다. 60년대말 베트남전의 추악한 진실들을 둘러싸고 벌어져, 69년 절정을 이뤘던 반전 시위는 존슨 대통령이 다음 선거에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을 북베트남 정권과의 협상 테이블로 강요했다.
미국 주교단은 지난해 가을 주교회의 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성명에서 전쟁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기도와 연대」를 강조했다. 평화의 주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와 연대」의 힘을 믿고 반전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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