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이색적으로 느낀 규정 가운데 하나가 침묵이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지켜야 되는 침묵은 16~17세의 어린 학생들에게는 고해성사의 단골 메뉴일 뿐 아니라 왜 지켜야 하는지 그 당시로서는 의미를 깨닫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흔을 눈앞에 두면서 느끼게 되는 마음은 인생의 신비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맡기고 의탁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침묵」외에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왜 성서의 저자들과 교회가 침묵을 강조하는지 20년 전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침묵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은 특이하게 2개의 복음을 읽게 되는데 이 복음을 통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길 위에 나뭇가지와 옷을 깔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라고 외치며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보내던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이 궁지에 빠지자 이제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태도를 돌변하는 군중들.
어떻게 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예수를 잡아 죽일까 궁리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내통하여 스승을 넘겨주기로 작정하고 배신의 키스로써 스승을 죽음의 길로 밀어 넣는 제자 유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노라고 철석같이 맹세하고서도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스승을 철저히 배신하는 베드로 사도. 수난을 앞두고 고통과 번민 속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서도 스승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에 곯아 떨어져 꿈속을 헤매고 있는 핵심 제자들. 죄 때문이 아니라 대사제들의 시기 때문에 잡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사실적 진리에 눈감아 버리는 인간적 지혜의 소유자 빌라도. 궁지에 빠진 예수님을 철저히 조롱하고 농락함으로써 권력에 기생하면서 가학적 욕구를 즐기는 로마의 군인들. 1년 동안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많은 금액에 해당되는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으면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는 이름 없는 한 여인.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유다인들이 침묵하던 그때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로마인 백인대장. 열두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도 끝까지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 의회 의원의 신분으로서 불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몇 명의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 수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양쪽에서 수놓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2가지 사실을 느껴 봅니다. 하나는 이들 각각의 모습은 수많은 타인의 모습이 아니라 결국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은 반드시 「선」을 통해서만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타나지만 하느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적극적으로 악을 통해서도 여전히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을 금하라고,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가지고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드러나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의지가 문제이고, 하느님은 「선」뿐만 아니라 「악」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신의 수난을 묵묵히 받아 들였던 예수님의 침묵을 본받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은 달리 없을 것 같습니다. 『시공과 선악을 초월하여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기에 오늘의 사건과 사람들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내일의 결과는 하느님께 의탁하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감!』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다른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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