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 초 「38 정치보위부」에서 풀려난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집안 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 때에 나는, 이제 곧 공산정권이 무너질 것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사흘만에 서울이 무너지고 북한군이 계속 남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실망이 매우 컸다. 그러나 곧바로 UN군이 참전하여 얼마 뒤 서울이 수복되고 UN군이 계속 북상한다는 소식에 나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틈틈이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때에 북한 공산정부는 패색이 짙어지면서 젊은 청년들을 모두 강제로 징집하였다. 그래서 이리저리 도피 생활을 하던 나는 1950년 10월 중순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붙들려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징병관들은 징집된 청년들을 영유읍(지금 평양 공항이 있는 도시) 근처에 있는 어떤 폐광 갱도 안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모두 갑종으로 합격시켰다. 그 길로 우리는 총을 든 두 병사의 인솔하에 걸어서 북쪽 어디론가 끌려갔다. 하루 종일 걸었는데, 어둑어둑한 저녁때에 고향 가까운 곳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이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대열을 벗어나 가까운데 있는 이모님 댁으로 갔다. 그러나 이모님 댁에도 머물 수가 없었고, 마침 동네 청년들이 징집을 피하여 숨어 있는 높은 뒷산에 올라가서 그들과 함께 낮에는 망을 보고 밤에는 굴속에서 자면서 며칠을 지냈다. 1주일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UN군이 숙천 평야에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였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그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평양을 탈환한 UN군이 북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의 앞길을 차단하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나는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공산 치하로부터의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다시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골몰하였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소식이 어두워서 안타까움이 많았다.
1950년 10월 중순께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평양교구 소속의 강현홍, 장선흥 두 신부(모두 고인이 되었다. 그 때에 남한에 평양교구 신부는 둘 뿐이었다)가 국방부 정훈국 종군신부로, 평양교구 사제로서는 제1진으로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았다. 그들이 평양교구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에 마침 메리놀회 안 신부(George Carroll, m. m. 후에 몬시뇰.註)가 「미 8군 소속 군종신부」로 평양에 파견되어 왔는데, 그 때에 윤공희 신부(전 광주대교구장)도 함께 왔다. 그런데 마침 11월 7일 안신부가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됨으로써, 한국인 신부 3명과 태평양 전쟁 전에 평양교구에서 일하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었던 메리놀회 선교사 신부 4명이 다시 돌아와 함께 용기백배하여 평양교구 재건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 노력도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전쟁 개입으로 UN군이 후퇴함에 따라 한 달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중공군이 고향에 밀어닥치기 직전인 11월 중순께, 중공군의 전쟁 개입 같은 것은 알 리도 없었고 다만 신학교에 간다는 일념으로 평양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미 중공군이 고향까지 들어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평양에서 오래 머무를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때에 평양에는 중공군에 쫓겨 나온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12월 3일 교구장 서리이신 안몬시뇰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때에 몬시뇰께서는 나의 월남을 종용하시면서 신원보증서를 하나 써주셨다. 「이 사람은 신학생이니 필요한 도움을 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몬시뇰께서는 월남하는 신자들에게 그런 신원보증서를 밤새워가며 2000장이나 써 주셨다고 한다. 많은 신자들이 무사히 피난하기를 바라신 착한 목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12월 4일 아침 대동강을 건너야 남한으로 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몬시뇰께서 써주신 증명서를 소중히 간직하고 대동강변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피난민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는 폭격으로 다 부서지고 군인들을 위한 임시 부교(浮橋)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작은 나룻배가 몇 척 사람을 싣고 오가긴 하였지만 그 많은 피난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보니 대동강을 건널 방도는 부교를 건너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때다 싶어 안몬시뇰께서 써주신 증명서를 들고 부교를 건너는 지프차 운전병마다에게 보이며 태워주기를 간청했다. 두 세 번 거절을 당하고 난 다음에 어떤 한 차가 타라고 손짓을 하지 않는가! 확실히 기억을 못하지만 호주 군인이었던 것 같다. 피난민들 사이를 간신히 헤치고 부교에 다다르자 차는 쏜살같이 부교를 건넜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차에서 내려, 새장 문이 열려 날아가는 새 모양 가벼운 마음으로 정처없이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손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구두가 발에 맞지 않아서 한 동안 맨발로 걷기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 그날 저녁에 중화(평양에서 약 50리. 지학순 주교님의 고향)까지 가서 성당에서 하룻저녁을 지냈다.
※註 : 안몬시뇰은 1931년부터 메리놀회 선교사로 평양교구에서 여러 본당의 주임신부를 역임하였고,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동료 선교사들과 같이 구금되었다가 1942년 본국으로 추방되었었다. 광복 뒤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교구장 서리와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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