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도착
우리 일행은 약 10일 만에 해주에 도착하였는데, 국군들이 피난민을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UN군이 머지않아 북상하므로 피난할 필요가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룻저녁을 성당에서 머문 뒤, 상황도 알아보고 이왕 떠난 피난길이라 서울로 갈 수만 있다면 가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 가는 길목에 나가보았다. 거기에도 대동강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국군들이 피난민들의 남하를 막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면서 국군들과 승강이를 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남하할 수가 없어 보였다.
김충무 신부 일행에 합류
▲ 남하하던 필자에게 큰 도움을 준 김충무 신부
지원병 모집에 응모
이왕 대체역사 말이 나왔으니 피난 도중에 있었던 일 한 가지를 더 소개하겠다. 어디서였는지 지금 기억은 없지만 국군이 남하하는 피난민들 가운데서 젊은이들을 상대로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에, 이 난국에 월남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신학교에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이북에서는 비록 징병을 기피하였지만 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처한 이 마당에 우선 국민의 의무를 다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원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좀 기다리라고 하고 자리를 뜬 그 모집원은 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 때에 나는 병역을 지원하는 거야 어디 가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길로 서울까지 갔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니까 길가에서 남하하는 모든 청년들을 강제로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이왕 서울까지 왔으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나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뒷골목 길로 피하여 서울 외숙님 댁에 갔다. 「만약에 그 때에 군대에 갔더라면 지금 나는 어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다난했던 피난길
서울에 닿은 것이 12월 2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평양을 떠나 20일 만에 도착한 셈이었다. 긴 20일의 피난 동안 크고 작은 다른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나는 12월 25일 성탄날 신학교 소식을 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명동성당 낮미사에 갔다. 그런데 마침 덕원 신학교에서 나의 상급반이었던 베네딕도회 신학생 황춘흥 다미아노(현재 대구 가톨릭 신학원 원장 신부)를 만났다. 이미 대부분 신학생들이 피난을 떠났고 내일 마지막으로 대여섯 학생이 대구를 향해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혜화동 신학교로 달려갔다. 마침 평양교구 신학생 둘(김진하 요한 부제-이미 고인이 되었음, 정의채 바오로 -현재 서강 대학교 석좌 교수 신부)이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으로 망망대해에서 뗏목을 만난 기분이었다. 김진하 부제가 당시 신학교 학장이었던 정규만 신부님께 나를 소개하였고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남하할 것을 허락받았다. 나의 서울 신학교 입학은 이렇게 간단히 학장 신부님 한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신학생들은 그날 저녁에 용산 소신학교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마포 나루터에 놓여 있던 부교(浮橋)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남하하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註 : 김충무 신부는 본래 연길 교구 출신으로 새로이 착좌하신 평양 교구장 홍용호 주교의 요청에 의하여 평양교구에서 약 7년동안 본당 사목을 하였고, 월남하여 부산교구에서 사목하면서 진해 중앙동 제3대 본당 신부도 역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