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 나이 차면 맞는 금경축이 무어 그리 대수겠습니까. 그저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지요. 죽음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한 사도 바오로처럼 「주어지는 대로」 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 그 험한 격변기를 살아낸 삶의 무게가 어찌 가볍겠는가. 더욱이 봉헌된 사제로서의 삶이기에 사제수품 50주년의 가치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금경축을 맞은 서강대 석좌교수 정의채(바오로.78) 신부는 한국 가톨릭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
가톨릭 철학을 포함한 국내 철학계에서 큰 열매를 거둔 연구 성과는 차치하고라도 평신도 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사상연구소를 설립하도록 지원하고 서강대 철학연구소를 설립하는가 하면 생명문화연구소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불러오기까지, 교회와 사회 안에서 학문적 풍토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한국 가톨릭철학회와 유례없이 연임하고 있는 아시아 가톨릭철학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세계 가톨릭철학계에 한국 교회의 사상적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4년간 물불가리지 않고 사목전념
하지만 정신부가 정작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간으로 꼽은 것은 수품 직후 4년 남짓한 보좌신부 시절이었다.
『돈이다 뭐다 신경 쓸 일이 많은 주임보다는 오로지 신자들을 만나고 전교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보좌신부를 자원했습니다』
전쟁 통에 피란민들이 모여 있던 부산 초량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전교에 힘썼다. 예비신자가 모이는 날, 2000여명이 몰려들었다. 가마니와 마분지를 깔고 레지오 단원들이 10~20명씩 예비신자에게 교리를 했고 1500명이 넘는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았다.
『물불 가리지 않고 사목활동에 전념했던 당시가 가장 보람 있었지요. 열정 하나로 사목에 나섰던 그때만큼 사제로서 뜻깊은 시간이 없었습니다』
「미사 한 번만」 소망이 50년으로
『공산 치하, 전쟁, 피란 등 수시로 생명이 위협받는 시기에 그야말로 절대적인 한계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사태가 긴박해지면서 한 달만이라도 신부로서 사목활동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위험이 가까워지면서 한 달만이라는 소망은 「한 주일만」으로 바뀌었고 「하루만」, 마침내는 미사 한 대만이라도 드리고 세상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한두 번 위기를 모면하고 「한 번만」이라는 소망은 50년이라는 긴 세월로 이어졌다.
『한두 번의 기적은 우연이지요. 하지만 연속된 우연은 필연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그렇게 많은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오직 감사하다는 말 밖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신부의 금경축 소감은 감사, 하느님의 은혜, 자비라는 말로 요약된다.
지성인들이 먼저 복음화돼야
정신부가 이런저런 연구소와 학회 설립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지성인들의 세계가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지성인 교리반을 통해 1000여명의 지성인들이 영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성의 세계에 가톨릭시즘이 파고들지 못한다면 참된 복음화는 난망입니다』
연구소 설립과 지원은 그 한 방편이었다. 정신부는 또 시종 능력 있는 평신도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전히 왕성한 저술 외에도 아시아철학회를 이끌며 올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세계 가톨릭철학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신부. 요즘 집중하는 과제는 동서 사상을 생명을 매개로 연결하는 것이다.
『향후 2, 3세기는 새로운 세계 창조의 진통이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닐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 가면 동서양 사상이 하나로 합쳐질 때가 올 것입니다』
과거 「정의」의 개념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정신부의 지적이다. 인간의 마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시각과 입장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는 「정의」를 넘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합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진통의 시기를 넘어서 공존, 공생, 공영이 인류의 과제가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종교가 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 미국 역시 「역사의 하수인」이다. 방법적 정당성은 또 다른 문제로, 미국의 승리로 핵이나 생화학무기 제거라는 세계적 과제가 달성될 것이지만 힘의 논리가 지닌 자체 모순으로 결국 그 힘의 주체는 내리막을 달린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몰락이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
배춧잎에서 지혜를 배워야
젊은이들, 사이버 세대에게도 할 말이 많다.
요즘 젊은이들로부터 다소간 획일적인 느낌을 받는다는 정신부는 유연성과 다양성을 잃지 않기를 당부했다. 하지만 과거 세대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자발성과 투신성을 높이 평가하며 교회 역시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의 위기가 논의되는 오늘날 정신부는 전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종교에서 전통이 빠지면 무너집니다. 젊은이들이 전통 때문에 종교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에 지친 다음 세대들은 오히려 종교를 더 열망합니다』
『전(前) 세대가 없으면 우리도 없고 오늘의 세대가 없으면 내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자칫 전통을 소홀히 여기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정신부는 그래서 「자연에서 배우라」고 말한다.
『배춧잎은 새싹이 나오면 다른 잎들이 그 새싹을 감싸 보호하고 새싹이 자라면 스스로 물러납니다. 젊은이들이나 기성세대나 이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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