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신자들은 잘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지만 부정(否定)신학이라는 신학의 한 분야가 있습니다. 이 말은 긍정신학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긍정 신학은 말 그대로 「하느님은 무엇이다」라고 긍정함으로써 하느님을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단점은 단지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규정하고 제한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 신학은 이러한 긍정 신학의 단점을 보충합니다. 즉 『하느님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정의함으로써, 예를 들면 『하느님은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정의함으로써 긍정적인 규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서술하고자 하는 신학 분야입니다. 대표적인 분이 너무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입니다.
제가 여기서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는 너무나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어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신앙생활에서 「아니다」라는 거부는 왠지 모르게 나쁜 무엇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외적 상황이 도저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음이 「선」이요 「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못된 본능을 가지고 있고, 또 부정적인 무엇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것에 비해 부차적인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요, 전체적 삶에서 부정적인 태도보다는 긍정적인 무엇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오고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정도 긍정적인 인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보다 더 확실한 진실을 위해 불확실한 사실과 추론할 수 있는 거짓에 대한 거부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충분한 의미를 가진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에 대한 부정도 그것이 긍정을 위한 거부인지 아니면 부정을 위한 부정인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은 긍정의 길 뿐만 아니라 부정의 길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로서 매년 우리는 토마스 사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 등 부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초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을 후대의 신앙인들의 행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토마스 사도는 어떤 한 개인을 의미하기보다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더 확실한 증표를 찾고자 하는 우리, 믿음 생활 속에서도 의심과 회의를 반복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약한 우리 각자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는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란 말은 명명백백한 증거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싶다는 우리의 소망, 아니 절규에 가까운 우리 신앙인들의 몸부림을 대신하는 표현이요, 모든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 두려움(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갸륵한(?) 마음입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각도에서 확인하고픈 또 하나의 보통 인간, 어쩌면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인식하는데 있어 쉽게 빠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면서 그러한 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고 100% 완전한 「선」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러한 길을 통해서도 주님께 대한 완전한 신앙고백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희망으로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복음 후반부에 보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유일한 행복선언이 함께 자리 하는데 그 이유도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다양함과 그 두 가지 길 모두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체험 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형식과 방법의 차이」를 가지고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선악을 논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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