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간신히 피난 열차를 탔는데, 기차가 초만원이어서 기차 꼭대기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대구에 도착하여 보니 먼저 온 10여명의 신학생들이 주교관 부속건물인 「안넥사(annexa: 지나가는 신부님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에 모여 있었고 늦게 도착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는데, 당시 신학생 총급장이었던 이인하 베네딕토 부제님(전 대전교구 총대리 신부)의 친절하고 겸손하였던 태도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약 한 달 동안 우리는 그곳에 머물면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냈다. 그 때는 전쟁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기여서, 주교님을 비롯한 신학교 장상 신부님들은 신학교의 앞날을 걱정하고 신학생들의 학업을 계속 시키려고 동분서주하며 어려운 일을 하는 때였지만 나로서는 모처럼의 편안하고 걱정 없는 나날이었다. 홀홀 단신 길고 힘겨운 피난길을 마치고, 비록 아직 피난 생활이었지만 의지할 수 있는 장상들이 계시고 동료들과 함께 있으니 걱정될 것이 별로 없는 나날이었다. 다만 신학교의 학업을 계속하는 문제가 쉬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한라산 공비 습격 받아
결국 신학교는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1951년 1월 24일 부산에서 상륙정(LST)을 타고 25일 아침에 제주도 화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 길로 서귀포읍 성당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부터 서홍리에 있는 공소(지금은 한국 순교복자 수도회 피정의 집이 있음)에서 피난 신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소 성당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하고, 낮에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등 매우 어려운 피난생활이었지만 젊었던 탓인지 별로 힘들었었다는 기억은 없다.
우리의 서홍리 피난 신학교생활은 오래가지를 못했다. 그 때에는 한라산에 공비들이 많이 있었고 가끔 마을을 습격하여 양식을 훔쳐가거나 사람을 해치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머물고 있던 서홍리 부락이 공비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공비의 습격에 대비하여 제주도의 온 마을들은 돌담으로 마을을 둘러쌓고 밤에는 동네 청년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지키곤 하였다. 우리 마을이 공비의 습격을 받은 것은 비가 내리는 3월 1일 저녁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소신학생 한 사람과 함께 북문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는데(북문, 동문, 서문이 있었는데 북문이 바로 한라산으로 통하는 길가에 있었다), 공비 수십 명이 총을 쏘며 갑자기 습격해 들어온 것이다. 다행히 캄캄한 밤이어서 공비들이 우리가 불침번을 서고 있던 원두막을 발견하지 못하여 구사일생으로 납치되는 것을 면했었다. 웃어른 신부님들은 물론이고 모든 신학생들이 우리 둘이 납치된 줄 알고 걱정을 많이 하였었다. 이런 경우에 「죽을 뻔했다」는 표현이 맞는 말일 것이다! 뒷날 내가 제주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갔을 때, 서홍리를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내가 여기서 피난 생활을 할 때에 공비에 맞아 죽을 뻔했는데 이제 제주에서 정말 죽게 되었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주교는 그 교구에서 삶을 마치는 것이 교회 전통이기에 사실 나는 제주에서 뼈를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직자 묘지에서 헨리(Henry, 玄海) 대주교님(나의 전임 제주 교구장, 골롬바노회 미국인 선교사) 무덤을 참배할 때마다 그 옆이 바로 내 자리거니 속으로 되뇌곤 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나는 제주에서 전주교구로 전임되었고, 다시 전주에서 마산교구로 전임되었으니 몇 차례나 「죽을 뻔」하고 이제 「제2의 고향(내가 월남하여 가장 오래 산 곳이 서부 경남이다)」인 마산에서 「정말로」 나의 삶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사람은 계획하고 하느님은 결정한다(Homo proponit, Deusdispo nit!)」는 라틴말 격언도 있지만, 주님의 섭리하심은 헤아릴 길이 없다.
공비의 습격으로 놀란 우리는,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제주읍으로 신학교 자리를 옮겨 5월 중순까지 있다가 전쟁 형세가 호전됨에 따라 다시 부산시 영도에 가교사를 짓고 자리를 옮겼다. 1953년 9월 서울로 복귀할 때까지 영도 신학교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영도신학교서 철학공부
나는 영도 신학교에서 1952년 7월까지 1년 동안 철학 공부를 하였다. 그런 가운데 로마에 유학을 가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전쟁 중인지라 유학 수속이 매우 어려웠다. 어렵사리 수속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몇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 첫째는, 4남 3녀 가운데 셋째인 내가, 형님 둘이 월남을 하지 못한 처지에, 어려운 피난살이를 하시는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들을 떼어놓고 나 혼자만 좋아지려고, -사실 유학을 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먼 곳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인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신학생으로서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처지도 아닐 뿐 아니라 사제는 부모와 가정,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면서 장상의 명대로 유학길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 당시 월남 피난민들의 피난살이가 너무나 어려운 처지여서 고국을 떠나는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 둘째 고민거리는 로마에 가면 외국어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특히 라틴말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라틴말 실력이 없는 나로서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로 가는 우리 일행은 부산교구 신학생 한 사람(사제가 되지 않고 귀국하였음)과 김영환 베네딕토 몬시뇰(대구대교구. 전 광주 가톨릭 신학대학장) 셋이었다. 우리는 1952년 8월 14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서 출발하여 동경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날 저녁 네덜란드 항공(KLM) 프로펠러 비행기로 17일 아침에 로마 챰피노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