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8월 17일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무사히 로마 참피노(Ciampino)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백남익 디오니시오(대전교구·몬시뇰·전 천주교 중앙 협의회 사무총장) 신학생이 친절하게 우리를 마중 나와 주었다.
그 때에는 로마에 한국 사람이 신학생 다섯 명과 신부 두세 분 그리고 일반 유학생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 주재 한국 대사관은 물론 영사관도 없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에 한국인 수가 수천 명을 헤아리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내가 다닌 우르바노(Urbano) 신학교는 1627년에 우르바노 8세 교황께서 전교지방의 사제 양성을 위하여 세우신 신학교이다. 내가 공부하던 1950년대에는 전 세계 약 40개국의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는 인종 전람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민족과 이해 관계들이 서로 엇갈리는 나라들의 신학생들이 함께 살면서도 서로 친하고 평화롭게 지냈다.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신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로마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로마 근교에 있는 산 동네 읍이며 교황님의 여름 별장이 있다)에 있는 신학생들의 여름 별장에서 한 달쯤 지내고 9월 중순부터 새 학기를 맞이하였다. 모든 학과 강의와 시험이 라틴말로 이루어지는 때였기 때문에 나는 철학과 1학년에 등록할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첫 학기에는 강의를 거의 못 알아들었다. 라틴말뿐 아니라 그 밖의 외국어 실력도 모자라 유학 기간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 공부하는 동안 소화불량으로 고생을 한 적이 가끔 있었는데 아마 어학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철학 3년과 신학 4년을 마치고 1958년 11월 23일 44명의 동료들과 함께 포교성(오늘날의 인류 복음화성) 장관인 아가지아니안(Agagianian) 추기경으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나는 사제 서품 때에 관례적으로 사제들이 택하는 성경 구절을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 2)를 택하였다. 부당한 내가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사제가 되었다는 생각을 마음깊이 새기면서…!
사제 서품 뒤 장학금으로 사회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마침 그 때는 교회 안에 종교 사회학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시기였다. 사실 전통적 교회 학문인 철학과 신학만을 공부하였다가, 2년에 걸친 사회학 수업은 평생 사목자로서 살아온 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난 나는 안젤리꿈 대학(Ateneo Angelicum)에서 박사 학위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 논문의 내용은 사제요, 사회학자이며, 정치인인 돈 루이지 스투루초(Don Luigi Sturzo)의 사회학과 정치 이념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스투루초 신부는 형도 주교인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이 컸고, 교회의 사회교리 실현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분이다. 그는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하느님을 정치에 모셔드림」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정치 활동을 하였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52년에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종신 상원 의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교황 요한 23세와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도 「사제생활의 모범」이며, 그의 「가르침과 표양, 사제직에 대한 충성」 때문에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열심히 스투루초 신부의 사회학에 관한 책을 읽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 교구장 서리 안 몬시뇰(Msgr. George Carroll, m.m.)의 박사 학위를 중지하고 귀국하라는 명이 전달되었다. 그 당시 우리 한국에서는 신자 수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으로 사제의 수가 많이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주교님들은 사제 수급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었다. 그런 때에 갓 태어난 부산교구의 최재선 주교님께서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안 몬신뇰에게 평양교구 신부를 부산교구에 파견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셨던 것 같다. 평양교구 신부들은 평양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남한의 어느 교구에든지 소속되어 일을 해야 했다.
박사 학위 취득을 중지하고 귀국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나는 학위를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홀가분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사실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는 기꺼이 순명하고 귀국할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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