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영성은 대상과 기원과 목적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며 따라서 영성은 어떤 추상적인 지식이나 도덕, 제도 같은 것이 아니다. 특히 기도, 행동, 속죄, 선교, 내적, 외적, 관상, 활동, 전례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등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시간과 장소, 신학이나 수도회 등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한국적인 특유의 영성을 논할 수 있고 그 역시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역교회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영성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신앙과 삶에 필수불가결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전통적 영성들
많은 연구자들은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영성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을 세 가지 정도로 꼽는다. 순교적 영성, 내세-종말론적 영성, 그리고 사주구령(事主救靈) 영성이 그것이다.
우선 순교적 영성은 한국교회 순교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초기교회에서 최초의 이상적인 영성은 바로 순교로 나타났다. 순교적 영성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고 이러한 결합이 순교를 통해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돼 실현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이러한 영성이 나타난다.
한국교회 순교 역사 자체가 놀라운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들 순교자들의 영웅적 행위, 죽음 앞에서도 침착하고 평온한 기쁨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최석우 신부는 한국사목연구소의 제4회 토착화 연구 발표회에서 「한국교회 영성의 어제」를 통해 한국 순교자들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한국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순교를 통한 토착화는 삶과 죽음이 수반되지 않은 사상가나 신학자들이 외치는 토착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교회의 전통적 영성의 또 다른 특징은 종말론적 영성이다. 박해가 끝난 19세기 이래 현세를 무상한 여정으로 간주하면서 현세에서 착하게 살아 복되게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내세에서 영복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에서 이러한 내세-종말론적 영성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선종」(善終)이라는 말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다. 1860년대 널리 읽혀진 묵상서 중의 한 권의 제목이 「선생복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살아생전에 착하게 살아야 복되게 죽음을 맞이하며 그로써 사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 특징인 사주구령적 영성은 영혼을 사랑하고 그것을 구하려는 열정을 드러낸다. 이같은 영성은 주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을 섬기며 성사생활에 열심하게 참여하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선교사들의 선교에서 「영혼을 구하는 일」은 지상의 과제였다. 「성교요리문답」이나 「천주교리문답」 등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핵심적으로 담고 있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들에서도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 즉 사주구령(事主救靈)이 문답의 첫 조목을 이루고 있다.
최석우 신부는 논문에서 이러한 전통적 영성들 중에서 순교적 영성을 가장 한국적인 영성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의 목숨을 용감히 또 평온하게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한국적인 고난을 통해 채우고, 나아가 파스카 신비에 한국적인 풍요로움을 다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참된 토착화의 표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영성 출현
전통적 영성에 바탕을 둔 한국교회의 영성은 종종 사회보다는 개인적 구원에 치우치고 내세지향적인 구원을 지향한다는 지적이 있다. 사회 중산층에 해당되는 대다수 신자들에게서 이러한 개인 위주의 전통적 영성이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60년대 이후 격변기 안에서 교회내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투신이라는 형태로 사회적 영성이 나타났다. 산업 발전과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인간 기본권이 억압되는 정치, 사회 상황 속에서 가톨릭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보여준 사회적 투신은 기존의 사회복지 활동의 영역과 함께 사회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또 다른 영성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전부터 괄목할만한 성과와 기여를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의 영역은 특히 90년대 이후로는 해외 원조나 북한 동포 돕기로까지 확대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으며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봉사에 나선 수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활동은 이러한 사회적 영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앙 교육과 성서 연구가 여러 유관 단체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성서 연구에 있어서는 여러 전문 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일반 신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열의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 각 교구에서는 신자 재교육 차원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실시하고 있고 다양한 신심 단체와 모임, 연수와 피정 등에 자발적인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적극적이고 깊이있는 신앙 생활을 영위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져왔다.
이러한 열의에 대해 류병일 신부는 제4회 토착화연구발표회에서 「한국교회 영성의 오늘」을 통해 한국교회 영성에서 특별한 한 가지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활력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인의 심성 안에 있는 영성의 특징을 정열이라고 표현했다.
심상태 신부는 「한국교회 영성의 현주소와 전망」이라는 논문에서 한국교회의 역동성은 『순교적 영성을 위시한 전통적 영성의 계승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형성된 다양한 유형의 영성의 활력에 기인한다』고 풀이했다.
한편 영성 토착화를 위한 신학적 작업의 일환으로 동양과 서양의 영성을 조화, 융합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이어졌다. 불교와 유교의 경전과 사상을 연구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나타났고 다양한 학술 모임들을 통해 동양 사상과 종교들과의 교류 기회가 마련됐다.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동양의 심성과 정신을 연구하고 그리스도교 복음을 동양 사상과 종교의 언어로 해석하고 표현하려는 다각적인 시도가 이어졌다.
한국교회 영성의 빈곤 문제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종종 영성의 빈곤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곤 한다. 이같은 우려는 특히 정치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90년대 이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염려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영성이 빈곤하다고 할 때 그것은 기본적인 신앙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신앙 생활, 그리고 신앙적 확신과 가르침에 바탕을 둔 사회 생활, 공동체적이거나 개인적인 모든 차원을 포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심화되기 시작한 주일미사 참례자 감소, 쉬는 신자의 증가, 신자들의 익명화, 영성의 빈곤과 기복적인 신앙,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교회의 도시화, 대형화, 중산층화, 가난한 사람들의 소외, 교구와 지역간의 높은 장벽, 각종 권위주의와 세속주의 등을 통해서 영성의 빈곤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건전하지 못한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형태의 유사종교생활에 빠져들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영성의 빈곤 문제를 하루 속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하다. 이제 영성의 토착화는 한국교회 미래를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써 모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을 현대 사회와 교회에 맞게 해석하고 적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특별히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 신심과 영성에 깃든 참뜻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지닌 열정적인 종교심을 바르게 이끌어내고 지도할 수 있도록 적절하고 토착화된 신심 운동을 다양하게 계발하고 전개하는 것도 큰 과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 지도층이 한국적 심성을 갖추도록 노력하고 우리의 것에 관심을 아끼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아울러 서구 교회 중심의 신학과 교육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모든 문화, 사상, 삶의 양식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영성의 토착화는 신앙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러한 영성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회가 당면한 현실 문제와 과제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90년대 이후 심화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교회 영성의 참된 발전을 위한 선결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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