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귀국하면 외국 여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여행을 하며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 어렵지 않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상황하고는 너무나 달라 또 한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7월 6일에 로마를 떠나 9월 8일 성모님 성탄 날에 귀국하였으니 두 달쯤 여행한 셈이었다. 이집트, 이스라엘, 이란, 인도, 타일랜드 등 10여 나라를 거쳤는데 나라마다 입국 비자(Visa)를 받는 것도 큰일이었다. 오늘날은 그런 수고도 필요 없게 되었지만…! 로마에서 여러 나라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에서 동창생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무전여행이 가능하였다.
귀국한지 20일 만인 9월 27일 나는 평양교구 신부 두 분(현재 서울교구 소속인 장덕범, 유재국 신부)과 함께 부산에 내려가서 나는 초량본당 보좌로, 다른 두 신부는 중앙과 서면 본당의 보좌로 부임하였다. 긴 외국 생활에서 갓 돌아와 한국 사정에 어두워 서투른 일도 있고 잘못하는 일도 많았을 텐데 신자들은 나를 잘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어 재미있게 1년 반의 보좌 생활을 지냈다. 내가 모셨던 김경우 알렉시오 본당 신부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는데 참으로 열심하고 활동적인 좋은 분이셨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신부님의 평안한 안식을 비는 바이다.
본당 신부로서의 나의 첫 본당은 서부 경남 문산 본당이었다. 비록 신자수가 공소 신자까지 합쳐서 1500명도 안 되는 작은 농촌 본당이지만 100년 역사를 자랑하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본당이었다.
내가 문산 본당에 있는 동안에 마산교구가 부산교구에서 분리되어 나는 그때부터 마산교구 사제가 되었다. 나는 문산 본당에서 3년, 진주 옥봉 본당으로 자리를 옮겨서 4년을 사목하였다. 이 두 본당에서 지낸 7년이 나의 본당 사목의 전부인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1970년 8월 어느 날 「광주 대건 신학대학(오늘날의 광주 가톨릭 대학) 교수로 가라」는 장병화 주교님의 명령을 받았다.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명령이어서 매우 난감하였다. 나는 뚜렷한 전공과목도 없고 학생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학교의 사정이 어려우니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순히 주교님의 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웃어른의 명령에 굳이 나의 의견을 고집하여 불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면으로는 무모하다고 할까, 어렵다고 생각되는 일이 맡겨질 때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곤 한 것이 나의 생활태도였다. 오래 지난 뒤의 일이지만 주교 임명을 받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광주 대건 신학대학은 1962년에 개교하였는데 처음에는 예수회가 맡아서 운영을 하다가, 1969년에 광주 관구 주교단에 운영권이 이양되었다. 그 때까지 교수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미국 예수회 신부들이 학교를 떠남에 따라, 한국인 교수 신부가 아쉬운 때여서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나도 불림을 받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사회학을 얼마 동안 가르치고 주로 기초윤리 신학을 강의하였다. 본래 말주변이 없는 데다 전공을 하지도 않은 윤리신학을 가르치는데 -석사 학위만 있으면 교수 자격은 있다고 하지만- 참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 나는 보통 하루에 7~8시간을 공부해야 하였다. 우리말로 된 교과서(흔히 말하는 Manuale, 마누알레)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외국어로 된 전문 서적들을 참고하여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나에게는 그래도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이탈리아 말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말 책들을 많이 이용하였다. 그 덕택으로 이탈리아 말을 빨리 잊어버리지 않았고 지금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으니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학교에서는 강의하는 것 외에도 학생들의 영성지도와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바쁘고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에 재직하였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동안에 못했던 공부도 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학문적으로 머리를 정리할 수도 있었으며, 동료 교수 신부들과 일상을 함께 하면서 은연중에 배우는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뒷날의 나의 사목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이다.
1977년 4월 어느 날 나는 교황 대사님으로부터 제주교구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사제가 될 때에도 나의 부당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내가, 그리고 그 동안 사제 생활을 훌륭하게 잘 한 것도 아닌데, 더구나 주교직에 대하여 생각해 본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얼마나 무거운 직책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터에 응낙하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나의 의견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순명하며 살아온 그대로 망설임이 컸지만 어렵사리 받아드렸다. 이렇게 나의 신학교 교수 생활은 7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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