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주교회의 구성원
나는 25년 동안 주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여러 가지 사목 분야를 담당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주사목 담당을 비롯하여 「정의 평화 위원회, 신앙 교리 위원회, 천주교 용어 위원회, 가정 사목 위원회」 등을 담당하였었다. 그리고 주교회의 임원으로서는 상임위원과 서기 및 부의장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1999년 가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뜻밖에 의장으로 뽑히어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의장으로서 지낸 3년(1999년 10월~2002년 10월)은 참으로 세기가 바뀌고 천년기가 넘어가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중요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세기적 변환기의 뜻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머리를 짜내며 노력하는 모습들이 역력하였다. 교황님께서 교회의 과거사 반성을 발표하고 전 세계 교회가 교황님과 뜻을 같이하여 참회의 시간을 가진 것도 이 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 주교회의도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을 통하여 교회 쇄신과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바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뜻있는 기념행사도 전국적 또는 교구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중책을 맡고 일을 했다는 사실을 보람으로 생각하면서도 「좀더 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제주교구에서 5년, 전주교구에서 7년, 마산교구에서 14년의 봉직을 마지막으로 2002년 11월 11일 현직 주교로서의 25년을 끝맺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물론 개인적으로 기쁜 일도 있었지만 회한도 많다. 그리고 특히 제주와 전주, 마산교구를 거치면서 교구 발전을 위해 뚜렷이 이바지한 일도 없이 물러난 것을 아쉽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 시간, 주교 25년을 포함하여 사제생활 45년을 돌이켜 볼 때에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갓 사제가 되었을 때에 신자들이 「신부님!」 하고 부를 때에 어색하였고, 신학교에 있을 때에 학생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교수님!」 하고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리고 「주교님!」 하고 부를 때에는 더욱 그랬고, 「의장님!」 하고 불릴 때는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마디로 불안하고 괴로운 직책을 수행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 2001년 3월 교황청 정기 방문때 교황을 알현하고 있는 필자.
교구와 신자들께 감사
나는 이러한 나의 심정을 은퇴를 앞두고 주교님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면서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는 말로 대변(代辨)한 적이 있다. 사제로서 그리고 주교로서의 25년이 「좌불안석」이었으며 주교회의 의장으로서의 3년이 그 극치였다고…! 그런데 지금은 은퇴하여 편안하게 살고 있다. 「좌편안석(坐便安席)」에 옮겨 앉은 셈이다! 그러면서 한편 잘 한 일도 없이 살아온 나에게 편안한 여생을 배려해 주는 교구와 신자 여러분에게 미안하고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사제가 되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사제가 된 뒤에도 오늘까지 여러 가지 어려울 때에 나를 은총으로 감싸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뼈저린 감사를 느끼면서 남은 여생을 하느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쳐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간, 사제 서품 때에 택했던 성서 구절이 유난히 생각난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2).
하느님 사랑 노래하리라
오늘 이것으로 나의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의 연재를 마친다. 처음에 -들어가면서- 에서 이야기하였지만 「썩 마음이 내키지 않고 망설여지는」 글을 13회나 썼다. 이제 큰 짐을 벗은 기분이다. 그 동안 변변찮은 글을 애정을 가지고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된 모든 분들께 깊은 애정을 느끼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나도 그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드린다.
끝으로 나의 이 글을 정성스레 연재해 준 가톨릭 신문사와 담당 기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전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