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 교수의 논문인 「식민통치, 해방, 그리고 분단과 가톨릭교회: 교회-국가-사회 관계의 이데올로기 개괄과 성찰」은 우선,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지난 2000년말에 「쇄신과 화해」라는 문건에서 이 시기의 민족사 안에서 교회가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하여 행한 반성이 계속되어야함을 상기시켰다.
일제시기 한국가톨릭교회의 수장이었던 프랑스 뮈텔 주교와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정교분리원칙」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신사참배는 허용하는 한편, 신자들의 독립운동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단죄하게 했다. 결국 「정교분리」라기보다는 「정교유착」에 가까웠으며, 그러한 정교유착은 일제말까지 이어졌다.
해방 직후 노기남 주교 하에서의 한국가톨릭교회는 과거의 정교분리원칙을 탈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당시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그리고 한민당과 유착함으로써, 원칙적으로 국가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교회로서는 정교분리원칙을 제대로 탈피하지 못했고, 동시에 단독정부 수립이 곧 분단정권의 수립, 분단고착의 서곡이라는 민족사적 의미를 제대로 설파하지도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안중근 의사의 경우에서 우리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합일을 배워야 한다는 점, 「민족주권과 외세」의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될 성찰 주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이데올로기 관계에 주목한 이 논문은 국가-사회 관계에서 형성된 지배이데올로기, 특히 정교분리 이데올로기, 반공 이데올로기, 친미 이데올로기가 교회-국가 관계 안에서 교회에 의해 재생산되어 둘 사이의 유착을 형성했고, 교회 안에서 재생산된 지배 이데올로기는 교회-사회 관계, 특히 민족사 안에서의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제약하기도 했음을 보여주었다.
나정원 교수의 논문인 「근.현대 100년간 한국 가톨릭 지도자들의 국가관 연구」는 「뮈텔 주교와 사회교리, 1784년부터 1910년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선교의 자유가 용인되는 1886년 조불조약의 체결 전까지 국가의 교회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권력층이 가톨릭에 대해 우호적일 경우에는 교난이 일어나지 않았고 제한된 선교가 가능했던 반면, 우호적이지 않은 권력층이 등장하는 경우엔 교난이 항상 발생했다.
정조 이후 가톨릭에 비우호적인 권력층이 등장하여 새로운 교난인 신유교난이 발생했다. 황사영 백서 문제는 신유교난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었다. 황사영은 한계상황에서 신부 파견을 요청하고, 외국 군대의 시위를 통해 우호조약의 체결을 원했다. 필자는 개화기에 국가를 위해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국제정치에서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감각이 있는 민족주의자로, 교난기에 종교의 자유를 위해 서양세력의 도움을 요청하는 황사영은 제국주의를 초대하는 반민족주의자로, 두 사람을 단순히 대조시키는 식의 평가는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로마 교황(敎皇)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를 위임했고 파리외방전교회는 성직자 중심주의, 성사(聖事)중심주의, 직접적인 선교 위주의 선교 정책, 그리고 정교분리원칙을 견지했으며, 이것이 조선말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국가에 대한 태도였음을 이 논문은 밝혔다.
▲ 가톨릭은 일제하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가 적었지만 의료와 아동.노인복지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사진은 구한말 서당의 모습.
김어상 교수는 「근현대 100년의 한국사회와 가톨릭 사회교리 수용사-일본의 한반도 강점기(1905~1945)」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사회교리를 수용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으로 농민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그리고 야학과 같은 계몽운동이 가톨릭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추진되었음을 당시 교회의 공식출판물인 「가톨릭 청년」(조선5교구),「가톨릭 연구」(평양교구), 그리고 「경향신문」(경성교구)을 정리?요약함으로써 입증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사태」, 「사십주년」, 「하느님이신 구세주」 회칙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보편교회의 사회교리는 항상 한국교회와 함께 하였다. 예로써, 바티칸에서 발표한「하느님이신 구세주」(1937. 3. 19)의 경우, 한국교회는 같은 해 6월에 이미 번역, 소개하고 있어 그 당시 교통?통신 사정을 고려한다면 거의 동시적으로 소개되고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교회 공식 출판물의 영향은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사회로 파급되었음을 신자, 비신자를 망라한 「경향신문」 독자들의 투고란을 통해 입증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가톨릭교회가 사회교리 소개보급에 있어 보편교회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가톨릭 청년」과 「가톨릭 연구」가 주로 신자들의 교양과 사회생활에 대한 내용에 주력하였다면 「경향신문」은 신자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사회 전반에 계몽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박문수 박사는 「가톨릭 사회복지와 근대화-가톨릭 전래시기부터 1945년까지」라는 논문에서 1945년까지의 가톨릭 사회복지사를 고찰하였다. 필자는 가톨릭교회가 사회복지 분야에서 이 시기에 기여한 바를 교회사적인 맥락에서만 검토하던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조선 전체에 존재하였던 다양한 복지 주체들의 맥락 안에서 객관화시켜 살펴보았다.
전래 시기부터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조불조약 체결시기(1886)까지 100여년 동안은 모진 박해로 말미암아 감히 드러내놓고 복지 사업을 펼칠 수 없었지만, 신자들 가운데서 선의로 이웃과 신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교우촌에서는 한국 전래의 상호부조 전통을 이어 나갔다.
조불조약 이후 한일합방(1910)까지는 최초의 아동복지, 최초의 고아원, 양로원, 근대적 교육사업 등을 도입 및 설립하여,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근대적 사회복지의 매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 시기는 조선정부, 통감부, 개신교의 여러 교파, 불교와 여러 종교들이 나름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조선의 근대화와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
가톨릭은 일제하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가 적었지만 의료와 아동?노인복지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개신교도 교육과 의료 영역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기에, 천주교가 교회 내의 기존의 평가처럼 독보적이거나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는 식의 평가는 다소 자제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강영옥 박사는 「한국 가톨릭 여성운동의 흐름」이라는 논문에서 가톨릭 전래시기부터 1910년까지 한국 가톨릭 여성운동의 의의와 전반적인 흐름을 고찰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국의 근대 여성운동의 시발을 동학에서 찾거나 아니면 갑오경장을 기점으로 개화파 지식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필자는 가톨릭 전래와 더불어 한국 여성을 위한 근대 여성운동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가톨릭의 전래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었으며, 조선 여성들에게 개인의 존엄성을 일깨워주었고,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불어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특히 남녀평등사상, 일부일처제 결혼관, 동정녀로서의 독신제, 여성의 자아정체성과 사회적 활동에 주목했다. 그러나 개항기를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가 점차 남성성직자 중심의 제도교회로 정착되어가면서 교회 안의 여성들은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주체적인 신앙관이 축소되었다는 사실도 제시했다.
김재득 박사는 「종교정책과 가톨릭교회-조선총독부의 법.제도 및 행정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조선통치의 최고책임자였던 8인의 조선총독이 펼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밑그림은 무엇이었는지 접근, 분석하였다. 특히 가톨릭교회를 둘러 싼 이해관계 구조 속에서 조선총독의 정책패턴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어떤 갈등요인과 정책수단들이 함께 작용했는지를 법?제도 및 행정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총독부의 국정이념은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였으며, 종교정책의 목표는 「정교분리정책」, 「동화(同化)정책」, 「한민족분열정책」이었다. 종교는 「순수한 일제통치에 부응하는 교화기관으로서의 역할」만이 강조되었다.
총독의 권한은 막강하였고, 사이토와 우가키, 미나미 총독의 이러한 종교정책 실현의지는 도를 지나칠 정도였다. 총독들의 정책실현 과정에서 형평성, 민주성과 고객중심의 대응성은 없었으며, 「합법성」에 근거한 「능률성」과 「효과성」만을 추구하였는데, 합법성과 합목적성을 인정하는 범위도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보수적 종교행위만이 인정되었다.
결론적으로, 총독부의 종교정책은 논리적.경험적 근거와 설득논리로써의 타당성과 적실성이 결여되어, 전반적으로 문제를 봉합하는 수준의 임시방편이었고, 위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