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처음으로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초기 교회의 신앙 수용은 전통적 가치 체계에 대한 회의가 외부로부터 들어온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부돼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신앙 수용은 중국에서 천주교와의 첫 만남이 이뤄진 뒤 한역 서학서를 통한 학문적 접촉으로 진전됐다. 초기의 신앙 선조들은 복음 선교를 「천주의 명」으로 받아들였고 직접 전교에 나섰다. 이들은 지식층 뿐만 아니라 부녀자와 서민들을 위해 한글로 교리서를 저술했고 문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노래로 교리를 익히게 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한국교회 초기 신앙 선조들은 자발적 학습으로 신앙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교에 헌신해 최초의 성직자를 맞게 되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10년 동안 4000명의 신자를 갖는 교회로 발전시켰다.
1886년 한불 수호 조약까지 근 1세기에 이르는 박해 수난기에 조선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교회 지도층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으로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교회의 주축이 양반층에서 서민층으로 옮아갔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으로 독립교회가 된 한국 교회는 이제 평신도 지도자들이 아니라 교구장이 인도하게 됨에 따라 선교의 주체도 성직자로 바뀌게 된다. 이에 따라 평신도들은 선교의 주도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됐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국인 성직자들이 국내에서 교회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성직자들은 수단을 입고 공공연하게 선교활동을 하게 됐고 교회는 각지에 공소와 성당을 세워 교회 공동체 운영과 선교에 매진했다.
당시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가 강화됐고 한국인 사제의 양성에 주력했으나 장기간 박해로 인해 선교 정책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민족에 대한 핍박과 함께 교회 활동에도 많은 탄압과 구속이 가해졌다. 외국 성직자들이 체포되고 추방됐으며 신학교가 폐쇄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회는 다양한 선교활동으로 신자수를 배가시켰다.
한국인 사제가 증가하고 순교자 현양 활동을 통해 선교가 더욱 촉진됐으나 공동체적 신앙보다는 개인 구원 위주의 신앙이 강조됨에 따라 선교를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형성해나가지 못한 경향도 있었다.
▲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성직자 중심의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급속한 성장 구가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독립은 민족과 교회에 모두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었고 보다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 임하는 계기가 됐다. 엄청난 피해를 교회에 가져다준 한국전쟁 후 1950년대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무려 16.66%라는 경이적인 상승률을 기록했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았고 경제적으로 민생고를 겪는 중에 구호물자를 통한 선교가 활발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교회가 보여준 정의로운 모습 등이 입교에 큰 동기가 됐다. 1958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무려 24.1%의 신자 증가율을 보였다. 꾸준하고 가파른 신자 증가율의 상승세를 유지하던 교회는 1974년 신자수 100만을 돌파했다.
70년대와 80년대 암울한 독재 체제 아래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에 큰 관심을 갖고 부정부패, 빈부 격차 해소,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 민주화 투쟁 등 민족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천주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여기에 150주년 신앙대회, 선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서울 세계성체대회, 103위 시성식, 교황 방한 등 매머드급 행사들을 개최하면서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됐고 교회의 이미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제고시킴으로써 많은 이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밑거름이 됐다.
선교의 위기 대두
90년대 들어 교회 안에서는 이른바 선교의 위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늘어나던 신자 증가율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반해 냉담율과 주일미사 참례율은 점점 더 심각하게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일부 본당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른바 「새로운 양 찾기」 「잃은 양 찾기」로 대변되는 본당 단위 대규모 선교운동이 처음으로 지난 94년 인천교구 만수1동본당에서 시작됐다.
선교에 소극적이던 한국 천주교 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이 운동의 성과는 놀라웠다. 1000여명을 헤아리는 많은 지역 주민들이 일거에 영세하고 입교한 것은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회 만의 독특한 선교운동이었다. 그 후 이 운동은 서울대교구는 물론 교구 차원의 운동으로 적극 확산시킨 수원교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로 확산돼 갔다.
이와 함께 가두선교가 활기를 띠었고 현대 사회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직장인 사목의 활성화 등은 90년대 선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몸부림이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98년과 99년에는 세례자 수가 양적으로 눈에 띄게 많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운동 자체가 인력과 재정이 일시에 투입되는 한시적 운동으로써 선교 의식의 성숙을 위한 초기 단계의 선교 전략이라고 지적, 이러한 형태의 운동이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새로운 방향 모색
200주년 사목회의는 선교 의안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구원을 말씀과 행동으로 증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 선교.교육 의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 선교란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비롯한 7성사를 베푸는 차원에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 세상의 모든 차원에서 이해되고 전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와는 달리 현대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다. 따라서 선교에 있어서도 적응이 요청된다. 교회의 선교는 세상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근세 이후 서구 식민지 확장 정책과 맞닿았던 서구 문화의 일방적인 수출 형태의 선교 방식은 지양돼야 한다. 「현대의 복음 선교」는 복음과 문화의 만남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공식 문헌으로 복음화(선교)의 개념에 큰 변화가 있음을 일러준다. 신자 수를 증가시키는 양적인 선교만이 복음화의 전부가 아니며 문화와 사회 구조의 복음화를 모두 포함한다.
▲ 90년대 교회 안에서 선교의 위기가 거론되면서 일부 본당에서는 본당 단위 대규모 선교운동이 시작됐다. 사진은 수원교구 안산지구 합동가두선교 입교식 장면.
선교는 교회의 본질
선교란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선교교령 6항)을 말한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구속 사업을 완수한 후 성부가 성자를 파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사도들을 온 세상으로 파견하며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했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자이다.
이러한 선교 활동의 목적은 아직 교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지역이나 집단에 복음을 선포해 교회를 부식하는 일이다. 하지만 1974년 제3차 주교대의원회의의 결과로 교황 바오로 6세가 펴낸 「현대의 복음선교」에는 복음 선교의 개념이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교회를 부식하는 이러한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 공동체 안으로 이끄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 끊임 없는 쇄신을 통해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생활을 복음화하는 것까지 포함한다(현대의 복음선교 18항, 54항).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마련된 사목회의 선교의안은 말씀의 강생이 이뤄질 때에는 항상 『역사를 입는다』며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이곳에 강생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자국의 문화, 사회, 학문과 그리고 타종교 및 비가톨릭 크리스찬과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며 선교에 있어서도 토착화의 노력이 절실함을 지적했다.
의안은 이어 『이러한 대화를 통해 복음이 뿌려질 토양과 토질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악』한 다음 뚜렷한 선교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면밀한 선교 정책을 수립해 선교활동을 추진하지 않는 한, 현대에 있어서 교회 본연의 사명인 복음선교를 수행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